공시에 없던 큰손, 이틀 만에 사라지다
2026-09-22 · 8분 읽기
2021년 3월 26일 금요일, 미국 증시가 문을 열기도 전이었습니다. 월스트리트의 몇몇 트레이딩 데스크는 이미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가 바이어컴CBS와 디스커버리, 그리고 여러 중국 인터넷 기업 주식을 수십억 달러어치씩 한꺼번에 넘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량의 주식을 장 밖에서 기관끼리 한 번에 주고받는 거래를 블록딜이라고 합니다. 그날 하루, 바이어컴CBS와 디스커버리 주가는 각각 27% 넘게 주저앉았습니다.
이상한 건 그 매물의 주인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어느 공시에도 이만한 물량을 설명할 대주주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규정상 상장사 지분을 일정 비율 넘게 가지면 이름과 보유량을 신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투자자는 단 한 종목에서도 그 서류에 이름을 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몇몇 종목에서는 사실상 최대 주주에 가까운 덩치로 시장을 쥐고 있었죠.
주인의 이름은 아케고스 캐피털 매니지먼트. 외부 투자자의 돈은 받지 않고 한 집안의 재산만 굴리는, 이른바 패밀리오피스였습니다. 직원은 수십 명 남짓. 그 며칠 사이 이 회사의 자산은 사실상 전부 증발했고, 돈을 빌려준 은행들에는 100억 달러가 넘는 손실이 남았습니다.
금융위기 이후 규제가 촘촘해졌다던 시장이었습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회사 하나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요. 그 질문이 이후 몇 년 동안 시장의 숙제가 됐습니다.
남의 돈을 돌려준 펀드매니저
아케고스를 세운 사람은 한국계 미국인 빌 황입니다. 헤지펀드 업계의 전설로 불리던 줄리언 로버트슨의 타이거 매니지먼트에서 일을 배운, 이른바 '타이거 문하생' 가운데 한 명이었죠. 2001년에는 아시아 주식에 집중하는 타이거아시아를 차려 한때 수십억 달러를 굴렸습니다. 그러나 2012년, 미국 당국과의 소송 절차를 매듭짓는 과정에서 외부 자금을 돌려주고 펀드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펀드를 접은 뒤 그는 자기 돈만 굴리는 형태로 돌아왔습니다. 새 회사의 이름 아케고스는 그리스어로 '앞장서 이끄는 자'라는 뜻입니다.
외부 투자자가 없다는 건 단순한 형식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 남의 돈을 받아 굴리는 운용사는 감독기관에 등록하고 보유 종목을 정기적으로 신고해야 합니다. 하지만 순수한 패밀리오피스는 그 의무에서 상당 부분 비켜나 있었습니다.
덕분에 아케고스는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됐습니다. 분기 보고서에도, 지분 공시에도 이름이 없었죠. 그러면서 운용 규모는 빠르게 불어, 2021년 초에는 360억 달러 안팎에 이르렀다고 알려졌습니다.
투자 방식 자체는 단순했습니다. 소수의 종목에 확신을 걸고, 그 확신 위에 빌린 돈을 최대한 얹는 것.
주식을 사지 않고 주식을 가지는 법
아케고스가 쓴 도구는 총수익스와프(TRS)라는 파생상품이었습니다. 은행이 대신 주식을 사서 자기 이름으로 들고 있고, 그 주식에서 생기는 이익과 손실은 계약 상대방에게 그대로 넘겨주는 계약입니다. 은행은 그 대가로 수수료와 이자를 받습니다.
법적으로 주식의 주인은 은행입니다. 하지만 오르고 내리는 몫은 전부 아케고스의 것이었습니다. 이름과 실속이 깔끔하게 갈라지는 구조였죠.
이 구조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었습니다. 우선, 명의상 주주가 은행이니 지분 공시에 아케고스 이름이 나올 일이 없었습니다. 시장은 특정 종목에 거대한 단일 투자자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 주식을 전부 현금으로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부 증거금만 맡기면 됐습니다. 100달러어치 주식을 갖는 데 20달러만 있으면 되는 식이었고, 이렇게 적은 자기 돈으로 큰 포지션을 잡는 것을 레버리지라고 부릅니다.
레버리지는 양날의 칼입니다. 주가가 오를 땐 자기 돈 대비 수익이 몇 배로 불어나지만, 반대로 움직일 땐 손실도 같은 배율로 커집니다. 담보가 모자라면 은행은 추가 증거금을 내라고 요구하는데, 이것이 마진콜입니다.
아케고스는 몇몇 종목에 집중해 이 구조를 겹겹이 쌓았습니다. 은행들이 아케고스를 위해 들고 있던 주식은 한때 1,000억 달러를 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홉 개의 창구, 하나의 고객
이 사건이 단순한 도박 실패담과 갈리는 대목이 여기입니다. 아케고스는 한 은행하고만 거래하지 않았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 노무라,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UBS, 도이체방크, 미쓰비시UFJ, 미즈호 등 여러 대형 금융사와 따로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 내용은 은행끼리 공유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은행마다 자기가 내준 몫만 보였습니다. 한 은행에서는 적당해 보이는 규모가, 아홉 곳을 합치면 감당할 수 없는 크기가 되는 구조였죠. 게다가 같은 종목에 여러 은행이 동시에 물려 있었습니다. 한 곳이 팔기 시작하면 나머지 모두가 함께 다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는 사이, 위험만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경쟁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아케고스는 거래가 많고 수수료를 두둑이 내는 고객이었고, 은행들은 이 고객을 잡으려고 서로 조건을 양보했습니다. 요구하는 증거금 비율을 낮춰 주거나, 담보를 다시 계산하는 주기를 느슨하게 풀어 주는 식이었습니다.
은행 하나하나에게는 영업상의 작은 배려였습니다. 하지만 그 배려가 아홉 군데에서 동시에 이뤄지자, 전체 레버리지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가 나중에 외부 로펌에 맡겨 2021년 7월 공개한 172쪽짜리 보고서는 이 문제를 냉정하게 기록했습니다. 이미 2020년 8월, 내부 계산상 아케고스에 대한 노출이 5억 3,000만 달러로 잡혀 있었습니다. 한도는 2,000만 달러였습니다.
한도를 훌쩍 넘었는데도 아무 조치가 없었습니다. 보고서는 이를 '경영과 통제의 근본적 실패'라고 불렀습니다. 대형 고객을 놓치기 싫었던 영업 논리가 위험 관리보다 앞섰던 셈입니다.
3월 22일, 한 장의 증자 공시
방아쇠는 뜻밖의 곳에서 당겨졌습니다. 2021년 3월 22일, 바이어컴CBS가 30억 달러 규모의 신주 발행 계획을 발표합니다. 회사로서는 주가가 좋을 때 자금을 마련해 두려는 평범한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새 주식이 시장에 풀리면 기존 주식의 가치는 묽어집니다. 주가는 곧바로 내리막을 탔습니다.
이 종목은 아케고스가 가장 크게 몰아 담은 대표 종목이었습니다. 미국 검찰 발표에 따르면 3월 23일 빌 황은 주가를 떠받치려고 10억 달러에 가까운 추가 매수를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흐름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시장에는 이미 이 종목에 거대한 레버리지 포지션이 걸려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뒤였습니다.
3월 24일, 담보가 바닥났습니다. 은행들은 일제히 마진콜을 걸었고, 아케고스에게는 응할 돈이 없었습니다.
3월 25일 은행들은 긴급 회의를 열었습니다. 한꺼번에 팔지 말고 질서 있게 물량을 정리하자는 합의를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합의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같은 배에 탄 줄 알면서도, 먼저 뛰어내리는 쪽이 덜 젖는다는 계산이 이겼습니다.
먼저 판 은행, 기다린 은행
3월 26일 금요일,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가 먼저 움직였습니다. 담보로 잡고 있던 주식을 블록딜로 쏟아내기 시작한 겁니다. 오전에만 수십억 달러어치가 시장에 던져졌고, 뒤늦게 사정을 알아챈 다른 은행들까지 따라 팔면서 매물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바이어컴CBS와 디스커버리는 그날 각각 27% 넘게 떨어졌습니다. 바이두, 텐센트뮤직 같은 중국 기업의 미국 상장 주식도 비슷하게 무너졌습니다.
주말이 지난 3월 29일 월요일, 청구서가 날아들기 시작했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와 노무라가 나란히 거액의 손실 가능성을 경고했고, 두 회사 주가는 그날 큰 폭으로 떨어졌습니다. 그제야 시장은 지난 금요일의 정체불명 매물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게 됐습니다.

은행들의 처지는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담보로 잡은 주식을 남보다 먼저 처분한 쪽은 손실을 거의 피했습니다. 질서 있는 정리를 기다리다 뒤늦게 시장에 나온 쪽은 이미 반토막 난 가격에 물량을 떠안았습니다.
같은 고객, 같은 종목, 같은 계약 구조. 결과를 가른 건 몇 시간의 차이였습니다. 먼저 팔아치운 골드만삭스와 도이체방크는 사실상 손실을 피했고, 합의를 기다리며 움직이지 않았던 쪽이 가장 크게 다쳤습니다. 위기 앞에서 신사협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 준 장면이었습니다.
청구서는 은행으로 갔다
최종 집계된 손실은 참혹했습니다. 가장 큰 곳은 크레디트스위스로 약 55억 달러였습니다. 노무라가 약 29억 달러, 모건스탠리가 약 9억 1,100만 달러, UBS가 약 8억 6,100만 달러로 뒤를 이었습니다.
미쓰비시UFJ와 미즈호의 손실까지 더하면 전체 규모는 10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아케고스 자신의 자산은 그 며칠 사이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가장 큰 대가를 치른 곳은 크레디트스위스였습니다. 이 손실은 같은 해 터진 다른 사고들과 겹치며 은행의 신뢰를 갉아먹었습니다. 그리고 2023년 3월, 167년 된 이 스위스 은행은 결국 UBS에 인수되며 독립 법인으로서의 역사를 마감했습니다.

아케고스가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은행의 위험 관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시장에 깊이 새긴 사건이었습니다.
규제당국의 판단도 뒤따랐습니다. 2023년 7월 24일,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와 영국 건전성감독청은 크레디트스위스의 아케고스 관련 관리 부실을 이유로 합계 3억 8,700만 달러 규모의 제재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미 UBS가 크레디트스위스를 인수한 뒤라 벌금은 UBS가 물었습니다. 영국 건전성감독청으로서는 역대 최대 금액이었습니다.
형사 절차도 이어졌습니다. 빌 황과 최고재무책임자(CFO)였던 패트릭 핼리건은 2022년 4월 기소됐습니다. 2024년 7월 뉴욕 연방법원 배심은 빌 황에게 사기와 시세조종 등 여러 혐의에 대해 유죄 평결을 내렸습니다.
같은 해 11월 20일, 그는 징역 18년과 90억 달러가 넘는 배상 명령을 선고받았습니다. 다만 이 판결에 대한 항소가 진행되고 있어, 2026년 현재까지 최종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던 큰손이 남긴 것
아케고스 사태의 핵심은 누군가 대담하게 베팅했다가 실패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시장이 그 베팅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공시 제도는 큰 투자자가 어디에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 알리려고 만든 그물입니다. 그런데 파생상품을 한 겹 덧씌우자 그 그물은 아무것도 걸러 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지분 정보가 그 종목의 실제 수급, 즉 누가 얼마나 사고팔려 하는지를 전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레버리지의 속도도 기억할 만합니다. 빌린 돈이 섞인 포지션은 나쁜 소식 자체보다 훨씬 빨리 무너집니다. 주가가 조금 흔들리면 담보가 모자라고, 담보를 채우지 못하면 강제로 팔리고, 그 매도가 다시 주가를 끌어내립니다.
360억 달러가 며칠 만에 사라진 건 이 회로가 한 바퀴 돌 때마다 스스로 속도를 높였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판단을 다시 해 볼 시간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 잘못 없는 주주들이 함께 다쳤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날 27% 넘게 떨어진 종목을 들고 있던 평범한 투자자들에게, 회사의 실적이나 전망은 하나도 바뀐 게 없었습니다. 한 번도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는 투자자가 같은 종목에 너무 크게 올라타 있었을 뿐입니다.
시장에는 재무제표만 들여다봐서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위험은 대개 가장 조용한 곳에서 자랍니다. 어느 공시에도 이름이 없던 큰손이 며칠 만에 사라지며 남긴 교훈은, 지금도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