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금고에 39억 달러만 남았던 겨울
2026-09-15 · 8분 읽기
1997년 12월, 한국은행이 당장 꺼내 쓸 수 있는 달러는 39억 달러뿐이었습니다. 장부상 외환보유액은 이보다 훨씬 컸습니다. 하지만 상당 부분이 해외 점포에 이미 물려 있어서,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아니었죠. 매달 치러야 할 원유와 원자재 대금, 줄줄이 만기가 돌아오는 외채. 며칠을 버틸 수 있는지 세어 보는 편이 더 빨랐습니다.
국가 부도. 신문 제목에서나 볼 법한 이 말이 정부 내부 문서에 적히던 겨울이었습니다.
같은 해 1월만 해도 서울은 공기부터 달랐습니다. 한국은 직전 해에 '선진국 모임'이라 불리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했고, 재계 30대 그룹은 앞다투어 해외에 공장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라는 숫자가 자랑처럼 인용되던 때였습니다. 열한 달 뒤 그 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 앞에 구제금융 신청서를 내밀게 되리라고 내다본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불은 방콕에서 시작해 자카르타와 쿠알라룸푸르, 홍콩을 거쳐 서울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그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서 한국 기업이 돈을 빌리는 방식, 은행이 살아남는 방식, 회사가 주주를 대하는 방식이 통째로 바뀌었습니다.
방콕에서 붙은 불씨
1997년 7월 2일, 태국 정부가 손을 들었습니다. 자국 통화인 바트화를 달러에 묶어 두던 제도를 포기한 겁니다. 이렇게 자국 통화 가치를 달러에 고정해 두는 방식을 고정환율제라고 합니다. 환율이 움직이지 않으면 외국 돈을 빌려 쓰는 쪽은 마음이 편합니다. 갚을 때 얼마가 될지 미리 알 수 있으니까요.
태국 기업과 금융회사는 그 편안함을 믿었습니다. 해외에서 달러를 잔뜩 빌려 부동산과 공장에 쏟아부었죠. 하지만 고정은 공짜가 아닙니다. 환율을 묶어 두려면 중앙은행이 시장에 나온 자국 통화를 계속 달러로 사 줘야 합니다.
태국의 경상수지가 나빠지고 부동산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자, 투기 세력이 바트화를 대량으로 내던졌습니다. 태국 중앙은행은 달러를 쏟아부으며 버텼지만 보유고는 거의 바닥났습니다. 손을 든 그날, 바트화는 하루 만에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다음은 도미노였습니다. 필리핀 페소, 말레이시아 링깃, 인도네시아 루피아가 차례로 쓰러졌고, 10월에는 홍콩 증시까지 크게 흔들렸습니다. 아시아 전체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물길이 생긴 겁니다.

외국 투자자의 눈에 이 나라들은 서로 다른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아시아'라는 하나의 바구니였죠. 한 칸이 무너지면 나머지 칸도 같이 내다 파는 것. 그들에게는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불길이 닿기 전, 한국은 이미 금이 가 있었다
바깥에서 불이 번져 오기 전부터 한국 안에서는 균열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1997년 1월, 재계 14위였던 한보그룹의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습니다. 당진 제철소 하나에 수조 원대 자금이 들어갔고, 그 대부분이 은행 대출이었습니다.
한번 시작된 부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3월에는 삼미그룹, 4월에는 진로그룹이 무너졌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기아자동차가 휘청이기 시작했고, 10월에는 결국 법정관리 절차로 넘어갔습니다.
대기업 부도는 곧바로 금융권 부실로 옮겨붙었습니다. 가장 약한 고리는 종합금융회사, 흔히 종금사라 부르던 곳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해외에서 금리가 싼 단기 달러를 빌려와, 국내 기업이나 동남아 지역에 더 긴 기간으로 빌려주는 장사를 했습니다. 짧게 빌려 길게 빌려주는 구조죠.
이 구조는 빌린 돈의 만기를 계속 연장할 수 있을 때만 굴러갑니다. 이 연장을 롤오버라고 부릅니다. 뒤집어 말하면, 빌려준 쪽이 '이번엔 연장해 줄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멈춰 선다는 뜻입니다.
1997년 가을, 바로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해외 채권자들이 롤오버를 거부하기 시작한 겁니다. 아시아 전체가 위험해 보이는데, 한국 기업들은 줄줄이 부도를 내고 있었으니까요. 갚아야 할 달러는 당장 돌아오는데 빌려준 돈은 묶여 있었습니다.
11월 들어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연달아 내리자 만기 연장 비율은 더 떨어졌습니다. 외환보유액은 이 구멍을 메우느라 빠르게 말라 갔습니다.
11월 21일 밤, 그리고 12월 3일
1997년 11월 21일 밤,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국민이 받은 충격은 컸습니다. 바로 그때까지 정부는 대외적으로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은 튼튼하다'는 입장을 지켜 왔기 때문입니다. 그 뒤 열흘 남짓, 서울에서는 IMF 협의단과의 협상이 숨 가쁘게 이어졌습니다.

12월 3일, 정부와 IMF가 의향서에 합의했습니다. 이튿날 IMF 이사회는 대기성 차관을 승인했습니다. 규모는 특별인출권(SDR, IMF가 쓰는 회계 단위) 기준 155억, 당시 환산으로 약 210억 달러. 그때까지 IMF 역사상 가장 큰 지원이었습니다.
다만 한꺼번에 주는 돈은 아니었습니다. 즉시 꺼내 쓸 수 있는 건 약 56억 달러였고, 나머지는 약속한 정책을 지키는지 점검한 뒤 나눠서 주는 방식이었죠.
IMF 혼자 낸 돈도 아니었습니다. 세계은행이 최대 100억 달러, 아시아개발은행이 최대 40억 달러를 얹었습니다. 일본과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는 이른바 '2차 방어선' 명목으로 20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을 약속했습니다. 발표된 총 지원 규모는 550억 달러를 넘었습니다.
하지만 2차 방어선은 상황이 더 나빠질 때만 꺼내는 비상금이었습니다. 실제로 전부 집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돈에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금리를 대폭 올릴 것. 재정을 긴축할 것. 부실한 금융기관은 문을 닫게 할 것. 자본시장과 무역을 더 열 것.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할 것.
이 가운데 특히 가혹했던 건 금리를 올리라는 요구였습니다. 돈이 빠져나가는 나라에서 금리를 높이면 원화를 들고 있을 이유가 생기니, 환율을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이미 빚으로 버티던 기업들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달러당 2,000원, 그리고 정리해고
합의했다고 곧바로 안정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12월 2일 9개 종금사가 영업정지를 당했고, 여드레 뒤 5개가 더 문을 닫았습니다. 시장은 이 정도 지원으로는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외채를 감당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환율은 오히려 더 튀어 올랐습니다.
그해 초 8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은 12월 23일 달러 현찰 기준으로 2,000원 선을 뚫었습니다. 1년도 안 되는 사이, 원화의 대외 구매력이 절반 아래로 떨어진 셈입니다.
숨통이 트인 건 크리스마스이브, 12월 24일이었습니다. IMF와 주요 선진국이 자금을 앞당겨 주기로 하면서 100억 달러 규모의 조기 지원이 약속됐습니다. 동시에 해외 채권 은행들과 단기외채를 중장기로 바꾸는 협상이 시작됐습니다. 당장 갚아야 할 돈의 만기를 뒤로 미루는 이 협상이 사실상 부도를 막았습니다.
그다음은 정리의 시간이었습니다. 1998년 6월, 부실이 심한 은행 5곳이 퇴출됐습니다. 제일은행과 서울은행 같은 대형 은행은 공적자금 투입을 거쳐 매각 대상이 됐습니다. 은행이 대출을 조이자 기업이 줄줄이 넘어갔고, 기업이 넘어가자 사람이 밀려났습니다.
1998년 2월에는 노사정위원회 합의를 거쳐, 경영상 이유로 인원을 줄일 수 있는 정리해고가 법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숫자로 보면 이렇습니다. 위기 전 3퍼센트에 못 미치던 실업률은 1999년 2월 9퍼센트 가까이 치솟았습니다. IMF 집계로 1998년 한국의 실질 GDP(국내총생산)는 5.8퍼센트 줄었습니다. 1998년 5월 시점에는 가구의 약 80퍼센트가 소득 감소를 겪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통계 뒤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명예퇴직, 가족 해체, 노숙. 이 단어들이 한꺼번에 일상어가 된 몇 년이었습니다.
금반지를 들고 은행 앞에 선 사람들
1998년 1월 5일, 전국에서 금 모으기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결혼반지, 돌반지, 상패, 메달. 사람들은 집에 있던 금붙이를 들고 은행 창구 앞에 줄을 섰습니다. 4월 30일까지 약 351만 명이 참여했고, 227톤 안팎의 금이 모였습니다. 이 금은 수출돼 달러로 바뀌었고, 그 규모는 약 21억 달러로 집계됐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21억 달러가 위기를 끝낸 것은 아닙니다. 국제 지원 규모에 비하면 작은 돈이었고, 급하게 내다 판 탓에 손해를 본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장면이 오래 기억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국제 금융시장이 한국을 볼 때 판단의 절반은 '이 나라가 갚을 의지가 있는가'였습니다. 넉 달 만에 227톤이 모이는 나라. 그 사실은 어떤 숫자보다 강한 신호였습니다.
회복을 만든 힘은 다른 곳에도 있었습니다. 환율이 두 배 가까이 오르자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급격히 좋아졌고, 반대로 수입은 뚝 끊기다시피 줄었습니다. 그 결과 1998년 한국은 400억 달러 규모의 경상수지 흑자를 냈습니다.
나라 전체 생산이 마이너스로 주저앉은 바로 그해에, 달러는 오히려 쌓이기 시작한 겁니다. 이 흑자가 바닥났던 외환보유액을 다시 채웠습니다.
위기가 다시 짠 규칙들
1998년 5월 25일,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가 전면 폐지됐습니다. 그때까지 외국인은 국내 상장사 지분을 일정 비율 넘게 살 수 없었는데, 그 빗장이 풀린 겁니다. 이후 한국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비중은 빠르게 높아졌습니다.
오늘 개인투자자가 매일 들여다보는 '외국인 순매수'라는 숫자도 사실상 이때부터 무게가 실렸습니다. 자본시장 개방은 구제금융 조건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은 항목입니다.
기업 지배구조도 바뀌었습니다. 계열사끼리 서로 빚보증을 서 주던 상호지급보증이 금지됐고, 그룹 전체의 실상을 한눈에 보게 하는 결합재무제표가 도입됐습니다. 부채비율을 200퍼센트 아래로 낮추라는 요구도 내려왔습니다.
이사회에 회사 바깥 인사를 앉히는 사외이사 제도가 상장사에 자리 잡은 것도, 소액주주가 경영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본격화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그 과정에서 상징적인 이름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재계 2위 대우그룹입니다. 1999년 8월 주력 계열사들이 채권단 관리 아래 들어가면서 그룹은 사실상 해체됐습니다. '세계경영'이라는 구호 아래 빚을 내어 몸집을 불리는 방식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크게 보여 준 사례였습니다.
한국은 IMF에서 빌린 195억 달러를 2001년 8월 23일 모두 갚았습니다. 예정보다 약 3년 앞당긴 상환이었습니다. 이후 정부와 한국은행은 외환보유액을 두툼하게 쌓는 쪽으로 방향을 완전히 틀었습니다.
그늘도 함께 남았습니다. 정리해고가 제도로 굳고 기업이 인건비를 변동비, 즉 사정에 따라 줄일 수 있는 비용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비정규직이 늘었습니다. 소득 격차 확대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 겨울이 남긴 세 가지 질문
1997년의 한국은 망할 만큼 형편없는 경제가 아니었습니다. 수출은 늘고 있었고 공장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자산이 얼마나 많으냐가 아니라, 빚의 만기가 어떻게 짜여 있느냐였습니다. 짧게 빌린 돈으로 길게 투자해 놓으면, 자산이 아무리 멀쩡해도 연장을 거부당하는 순간 끝납니다.
개인의 계좌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합니다. 좋은 자산을 들고 있어도 그 자산을 산 돈의 만기가 자산의 만기보다 짧으면, 결국 가장 나쁜 가격에 팔아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전염도 기억해 둘 만합니다. 태국 바트화의 붕괴와, 서울의 어느 가장이 받아 든 명예퇴직 통보. 둘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국경을 넘는 돈은 나라를 하나씩 보지 않고 묶음으로 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산 종목과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먼 나라의 통화나 금리 뉴스가, 며칠 뒤 내 계좌의 숫자를 흔드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기 그 자체보다 위기가 남긴 규칙이 훨씬 오래 갑니다. 1997년의 공포는 몇 년 만에 지나갔지만, 그때 열린 자본시장과 그때 도입된 지배구조 제도, 그때 굳어진 고용 관행은 30년 가까이 한국 경제의 기본값으로 남았습니다.
역사를 읽는 이유는 다음 위기의 날짜를 맞히기 위해서가 아닐 겁니다. 위기가 지나간 뒤 세상이 어떤 규칙으로 다시 짜이는지 미리 알아보기 위해서죠. 금고에 39억 달러만 남았던 그 겨울이, 지금 우리가 사는 경제의 규칙을 새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