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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목요일, 월가의 엿새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오전 10시. 뉴욕증권거래소의 개장 종이 울리자마자 객장이 고함으로 뒤덮였습니다. 문을 연 지 3분 만에 300만 주가 손을 바꿨다고 전해집니다. 당시로서는 하루치에 가까운 물량이 단 3분 사이에 쏟아진 겁니다.

주문을 받아 적던 직원들의 손은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팔겠다고 외치는 중개인들의 목소리는 거래소 건물을 넘어 월스트리트 길바닥까지 들렸습니다. 그날 한 통신사 기자는 객장의 모습을 '거의 대혼란'이라고 적었습니다.

증권거래소 맞은편 건물 계단에 모인 군중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뉴욕증권거래소 맞은편 계단에 모인 사람들.AP 통신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더 끔찍한 건, 아무도 지금 가격을 모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시세는 '티커테이프'라는 가느다란 종이 띠에 전신으로 찍혀 나왔습니다. 전국 증권사 객장에 놓인 이 기계가 유일한 시세판이었죠. 그런데 주문이 폭주하자 기계가 실제 거래보다 몇 시간씩 늦게 찍히기 시작했습니다. 투자자들은 내 주식이 지금 얼마인지, 내가 낸 매도 주문이 얼마에 팔렸는지도 모른 채 몇 시간을 버텨야 했습니다.

불과 7주 전만 해도 이 거래소의 주가는 역사상 가장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 7주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그리고 '검은 목요일'이라 불리는 이 하루는 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을까요. 그해 10월의 엿새를 날짜 순서대로 따라가 봅니다.

주가는 '영원히 높은 고원'에 올랐다

1920년대의 미국은 흔히 '광란의 20년대'로 불립니다. 포드의 조립라인 덕분에 자동차는 노동자도 살 수 있는 물건이 됐습니다. 라디오라는 새 기계가 거실에 들어왔고, 전기와 냉장고가 생활을 바꿨습니다. 기업 이익은 실제로 늘었고, 주가가 오를 이유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주가가 오르는 이유가 슬그머니 바뀌었다는 데 있습니다. '기업이 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어제도 올랐으니까'로요.

1929년 9월 3일,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381.17포인트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습니다. 그해 여름, 주식은 더 이상 부자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발사와 구두닦이가 손님에게 종목을 귀띔하고, 가정주부가 신문을 펴면 시세란부터 찾았습니다. 주식을 안 사는 사람이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는 분위기. 그런 시절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공기를 가장 또렷하게 요약한 사람은 예일대의 저명한 경제학자 어빙 피셔였습니다. 폭락 직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가는 이제 영원히 높은 고원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당대 최고의 통계경제학자가 남긴 이 문장은 그 뒤 100년 가까이 시장의 자만을 상징하는 말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피셔 자신도 주식에 돈을 넣어 두고 있었고, 폭락 뒤 거의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대금의 10%만 내면 살 수 있던 주식

이 상승을 꼭대기까지 밀어 올린 장치는 '증거금 거래'였습니다. 주식값을 다 내지 않고 일부만 현금으로 낸 뒤, 나머지는 증권사에서 빌려 사는 방식입니다. 1920년대 후반의 월가에서는 대금의 10% 안팎만 있으면 주식을 살 수 있었습니다.

10만 원짜리 주식을 1만 원으로 사는 셈입니다. 주가가 10%만 올라도 내 돈은 두 배가 되죠. 듣기만 해도 솔깃한 계산입니다.

하지만 이 계산은 반대 방향으로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주가가 10% 내리면 내가 넣은 돈은 통째로 사라집니다. 그래서 담보가 모자라면 증권사는 '추가 증거금 요구', 즉 마진콜을 보냅니다. 돈을 더 넣으라는 통보입니다. 못 넣으면 증권사가 그 주식을 강제로 팔아 버립니다.

하락장에서 이 구조는 고리를 만듭니다. 주가 하락, 마진콜, 강제 매도, 추가 하락, 그리고 또 마진콜. 누가 겁을 먹어서 파는 게 아닙니다. 계약 조건 때문에 저절로 팔려 나가는 물량이 생기는 겁니다.

여기에 은행까지 끼어들었습니다. 은행들은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대신 증권사에 단기자금을 대 줬고, 증권사는 그 돈을 다시 투자자에게 빌려줬습니다. 이런 중개인 대출 잔액은 1920년대 후반 수십억 달러 규모로 불어났습니다. 주식시장과 은행이 한 줄에 묶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훗날 주가 폭락이 은행 위기로 번진 통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10월 23일 수요일, 예고편

9월 고점 이후 시장은 오르락내리락하며 조금씩 고도를 낮췄습니다. 첫 경고는 10월 23일 수요일 오후에 왔습니다. 이렇다 할 악재도 없이 장 막판에 매물이 쏟아져 시장 전체가 6% 가까이 밀렸습니다. 마지막 한 시간에만 260만 주가 거래됐습니다.

그날 밤, 전국의 증권사가 마진콜 전보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쏟아질 매물은 이미 그 전보 안에 예약돼 있었습니다.

10월 24일 목요일, 백기사가 나타난 날

10월 24일 목요일, 시장은 문을 열자마자 11% 가까이 주저앉았습니다. 이날 거래량은 1,290만 주에 가까웠습니다. 그때까지의 사상 최대 기록이었습니다.

정오 무렵, 월가의 거물들이 J.P. 모건 상회 사무실로 모여들었습니다. 모건 은행의 토머스 라몬트, 체이스 내셔널 은행의 앨버트 위긴, 내셔널 시티 은행의 찰스 미첼, 개런티 트러스트의 윌리엄 포터. 1907년 금융공황 때 J.P. 모건 본인이 직접 돈을 모아 시장을 멈춰 세웠던 장면을 다시 한번 재현하려는 자리였습니다.

회의를 마친 라몬트는 몰려든 기자들 앞에서 유명한 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거래소에서 약간의 투매가 있었습니다.' 1,290만 주가 거래되고 시장이 11% 빠진 날을 두고 하기엔 이상할 만큼 태연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지금도 '당국자의 안심시키기'를 대표하는 사례로 꼽힙니다.

그리고 오후 1시 반쯤. 거래소 부이사장 리처드 휘트니가 US스틸 입회장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은행가들을 대표해 US스틸 2만 5,000주를 주당 205달러에 사겠다고 외쳤습니다. 당시 시세보다 한참 높은 값이었습니다. 이어 다른 대형주에도 같은 방식으로 주문을 던졌습니다.

효과는 극적이었습니다. 그날 다우지수는 6.38포인트, 2.09% 하락으로 장을 마쳤습니다. 오전의 공포를 떠올리면 사실상 회복이었습니다. 휘트니는 하루아침에 '월가의 백기사'가 됐습니다.

안도의 주말, 그리고 월요일과 화요일

10월 25일 금요일은 조용했습니다. 후버 대통령은 '이 나라의 기본적인 산업 활동은 건전하고 번영하는 기반 위에 있다'는 성명을 냈습니다. 10월 26일 토요일은 당시 관행대로 반나절만 열렸는데, 지수가 소폭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주말 신문들은 위기가 지나갔다고 썼습니다.

거래소 안에 모여 있는 증권 중개인들
1929년 10월 25일 뉴욕증권거래소의 증권 중개인들.AP 통신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지금 돌아보면 이 이틀의 안도가 가장 잔인한 대목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때 '바닥을 잡았다'고 믿고 시장에 들어갔으니까요.

안도는 주말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10월 28일 월요일, 다우지수는 38.33포인트, 12.82% 떨어졌습니다. 이번에는 객장을 걸어 들어오는 백기사가 없었습니다. 은행가들은 다시 모였지만, 지난주처럼 값을 떠받치지는 않겠다고 정리했습니다. 질서 있는 시장을 유지하는 데까지만 돕겠다는 것. 떨어지는 칼날을 맨손으로 잡지 않기로 한 겁니다.

다음 날인 10월 29일 화요일, 이른바 '검은 화요일'이 왔습니다. 거래량은 약 1,600만 주로 기록을 또 갈아치웠습니다. 다우지수는 30.57포인트, 11.73% 떨어졌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 동안 사라진 몫을 합치면 23.05%입니다.

티커테이프는 그날 저녁 7시 45분이 돼서야 낮 동안의 거래를 겨우 다 찍어 냈습니다. 증권사 객장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장이 끝나고 네 시간이 지나서야 자기 재산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며칠의 폭락, 3년의 하락

하락은 10월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우지수는 11월 13일 198.69까지 내려앉았습니다. 9월 3일 고점에서 거의 절반이 날아간 수준입니다.

진짜 바닥은 거기서도 한참 아래였습니다. 1932년 7월 8일, 다우지수는 41.22를 기록했습니다. 3년 전 고점에서 89% 이상이 증발한 숫자입니다. 폭락은 며칠이었지만, 하락은 3년이었습니다.

폭락과 대공황은 같은 사건이 아니었다

흔히 퍼진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1929년 10월의 주가 폭락이 곧 대공황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사학자 대부분은 둘을 구분합니다. 주가 폭락은 방아쇠였고, 대공황은 그 뒤 3~4년에 걸쳐 만들어졌습니다. 그 사이를 채운 것은 줄줄이 이어진 은행 파산과 잘못된 정책이었습니다.

1930년 11월과 12월, 단 두 달 사이에 미국에서 은행 608곳이 문을 닫았습니다. 1933년까지는 미국 전체 은행 약 2만 5,000곳 가운데 9,000곳 가까이가 쓰러졌습니다. 당시에는 예금자 보호 제도가 없었습니다. 은행이 망하면 그 안의 예금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프리드먼과 슈워츠의 유명한 연구는 이 과정에서 미국의 통화량이 3분의 1 넘게 줄었다고 추정했습니다. 돈이 사라지자 물가가 떨어졌고, 물가가 떨어지자 빚의 실제 무게가 늘었습니다. 무거워진 빚은 또 다른 파산을 낳았습니다. 빠져나오기 힘든 악순환이었습니다.

정책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1930년 6월 17일 후버 대통령이 서명한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수천 개 품목의 수입 관세를 끌어올렸습니다. 상대국들이 보복 관세로 맞서면서 세계 무역은 얼어붙었습니다. 1,000명이 넘는 경제학자가 서명하지 말라는 청원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933년 미국의 실업률은 25%에 이르렀습니다. 네 명 중 한 명이 일자리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백기사의 몰락, 그리고 새로 생긴 규칙들

검은 목요일의 영웅 리처드 휘트니의 뒷이야기는 특히 씁쓸합니다. 그는 폭락 직후 뉴욕증권거래소 이사장에 올라 5년 넘게 월가의 얼굴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회사는 투기로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그 구멍을 메우려고 그는 남의 돈에 손을 댔습니다. 거래소 공제기금, 자신이 재무를 맡고 있던 뉴욕 요트 클럽의 돈, 그리고 장인 유산에 속한 채권 약 80만 달러였습니다. 1938년 3월 10일 횡령 혐의로 기소된 그는 죄를 인정했고, 싱싱 교도소에서 5년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가석방으로 풀려난 것은 1941년 8월이었습니다.

제도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1930년대 초 상원 청문회에서 당시 월가의 작전 세력, 내부자 거래, 은행이 자기 고객에게 부실 증권을 떠넘긴 관행이 줄줄이 드러났습니다. 그 결과 1933년에는 은행업과 증권업을 갈라놓는 법이, 1934년에는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생겼습니다. 기업은 투자자에게 재무 정보를 제대로 공개해야 한다. 지금은 너무 당연해 보이는 이 원칙이 법이 된 것이 이때입니다.

증거금 규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0%만 내고 주식을 사던 관행은 사라졌고, 빚으로 살 수 있는 비율에 상한이 생겼습니다. 주가가 일정 폭 넘게 떨어지면 거래를 잠시 멈추는 '서킷 브레이커'는 한참 뒤인 1987년 블랙먼데이 이후에야 도입됐습니다. 하지만 그 발상의 뿌리는 1929년 10월에 있습니다. 공포가 공포를 부르는 고리는 어디선가 한 번 끊어 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엿새가 남긴 불편한 기록

1929년 10월을 날짜별로 다시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실이 있습니다. '검은 목요일'은 사실 반등으로 끝난 날이었다는 것. 그날 지수는 고작 2% 남짓 내린 채 마감했고, 이튿날 신문은 위기가 끝났다고 썼습니다. 진짜 붕괴는 사람들이 안심한 주말을 지나 월요일과 화요일에 찾아왔습니다.

급락한 날 찾아온 반등은 흐름이 바뀌는 신호일 수도, 잠깐 숨을 고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둘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이 엿새가 남긴 가장 실질적인 교훈입니다.

빌린 돈의 성질도 다시 볼 만합니다. 1929년에 쏟아진 매물 상당수는 투자자가 팔기로 마음먹어서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담보가 모자라서 저절로 나온 물량이었습니다. 빚을 내 투자하면 내 판단의 유효기간은 내 담보가 버티는 기간으로 줄어듭니다. 시장이 결국 내 예상대로 가더라도, 그 전에 담보가 바닥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증거금 비율이나 대출 조건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을 적어 둔 계약서인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권위 있는 목소리도 틀립니다.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는 '영원히 높은 고원'을 말했고, 월가 최고의 은행가는 '약간의 투매'라고 했으며, 대통령은 '건전한 기반'을 이야기했습니다. 세 사람 모두 거짓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다만 그들 역시 그 순간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시장이 크게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가장 먼저 권위 있는 누군가의 한마디를 찾습니다. 그래서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이 엿새의 기록은 꽤 불편하게 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