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년 은행이 주말에 사라졌습니다
2026-09-27 · 7분 읽기
2023년 3월 19일 일요일 저녁, 스위스 수도 베른. 대통령과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 금융감독당국 수장이 한 무대에 나란히 섰습니다. 발표는 한 줄이었습니다. 167년 된 은행 크레디트스위스가 같은 나라의 경쟁자 UBS에 팔렸다는 것.
월요일 아시아 시장이 열리기 전에 끝내야 했기에, 협상은 주말 이틀 안에 욱여넣어졌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이름값 높은 금융기관 가운데 하나가, 시간표상 서른 몇 시간 만에 정리된 겁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1856년 스위스의 철도 건설 자금을 대려고 세운 은행입니다. 알프스에 터널을 뚫고 산업을 일으킨 돈이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그 이름은 스위스라는 나라가 스스로 그리는 자화상과 거의 한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지금까지도 싸움이 이어지는 대목은 인수 가격이 아닙니다. 손실을 떠안는 순서입니다. 이 은행의 주주들은 그래도 UBS 주식을 조금이나마 받았습니다. 반면 특정 채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채권이 주식보다 먼저 사라진 것입니다.
신뢰는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2023년 3월의 붕괴는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그 앞에는 몇 해에 걸친 사고 목록이 있었습니다. 2021년 이 은행은 미국 투자회사 아케고스가 무너질 때 55억 달러에 이르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 사건은 이 사이트의 다른 칼럼에서 따로 다뤘으니, 여기서는 한 회사의 파산이 유독 이 은행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점만 기억해 두면 충분합니다.
같은 해, 영국계 금융회사 그린실이 무너지며 또 한 번 타격이 왔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그린실이 만든 채권을 담은 펀드를 고객들에게 팔았는데, 그 펀드들이 한꺼번에 환매를 멈춘 겁니다. 묶인 고객 자금은 100억 달러 수준으로 거론됐습니다. 손실도 컸지만, 더 큰 상처는 고객 돈을 다루는 판단력에 대한 의심이었습니다.
장부의 숫자도 나빠졌습니다. 2022년 이 은행의 연간 손실은 73억 스위스프랑으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더 위험한 신호는 손실이 아니라 이탈이었습니다. 2022년 4분기에만 고객 자금 1,100억 프랑 넘게 빠져나갔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이 은행은 이 시기에도 규제가 요구하는 자본 기준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숫자로 잰 건강검진은 통과였던 셈이죠. 은행은 자본이 모자라서 죽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람들이 더는 돈을 맡기고 싶어 하지 않아서 죽습니다.
방아쇠가 당겨진 사흘
방아쇠는 2023년 3월 둘째 주에 당겨졌습니다. 3월 9일 목요일로 예정된 연차보고서 공개가 갑자기 미뤄진 것입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발표 직전에 연락해 와, 2019년과 2020년 현금흐름표에 대해 이미 공개한 수정 사항을 기술적으로 다시 점검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보고서는 3월 14일에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2021년과 2022년 재무보고 내부통제에 '중대한 취약점'이 있었다는 자기 고백이 담겨 있었습니다. 위험을 평가하는 절차와 내부 소통에 구멍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고객 자금 이탈이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숫자를 믿기 어렵다'는 말과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는 말이 한 문서에 나란히 들어 있었던 셈입니다.
이튿날인 3월 15일, 최대주주인 사우디국립은행의 아마르 알쿠다이리 회장이 방송 인터뷰에서 돈을 더 넣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의 답은 '절대 아니다'였습니다. 규제상의 이유를 비롯해 여러 사정이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지만, 시장의 귀에 남은 건 그 첫마디뿐이었습니다.
그날 크레디트스위스 주가는 장중 한때 31퍼센트까지 떨어졌습니다. 알쿠다이리는 2주 뒤인 3월 27일 회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타이밍도 최악이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 미국에서 실리콘밸리은행이 무너진 참이었습니다. 그 사건 역시 이 사이트에 따로 정리해 두었으니 여기서는 배경으로만 짚겠습니다. 중요한 건 시장이 이미 '은행'이라는 단어에 잔뜩 예민해져 있었고, 예금자와 투자자 모두 무엇이든 의심할 준비가 돼 있었다는 점입니다.
500억 프랑으로도 막지 못한 것
3월 16일 목요일, 스위스중앙은행은 크레디트스위스에 500억 프랑 규모의 긴급 유동성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환율로 550억 달러쯤 되는 큰돈이었습니다. 주가는 하루 반등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미끄러졌습니다.
돈을 빌려준다고 신뢰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돈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채워 넣는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은행에서 돈을 빼려면 창구 앞에 줄을 서야 했습니다. 지금은 앱을 열면 몇 초 만에 끝납니다. 뱅크런, 곧 예금 인출 사태의 속도가 통째로 달라졌고, 감독당국이 대책을 궁리할 시간도 그만큼 줄었습니다.
그래서 스위스 당국에게 주어진 시간은 금요일 장이 닫힌 순간부터 월요일 아시아 시장이 열리기 전까지였습니다. 그 주말 동안 정부와 중앙은행, 금융감독당국 핀마(FINMA), 그리고 UBS 경영진이 한데 붙어 결론을 내야 했습니다. 다른 선택지도 검토됐지만, 남은 답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같은 나라의 더 큰 은행이 통째로 받아 가는 것.
UBS로서도 내키는 거래는 아니었습니다. 부실이 얼마나 숨어 있는지 주말 안에 다 들여다볼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이 문제를 풀려고 정부가 손실 일부를 나눠 지겠다는 약속을 얹었습니다. 인수가 시장 거래라기보다 정책 집행에 가까워진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주말에 밀어붙인 인수
발표된 조건은 이렇습니다. 인수 가격은 30억 스위스프랑, 당시 기준 32억 달러 수준이었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 주식 22.48주를 UBS 주식 1주로 바꿔 주는 방식으로, 한 주당 0.76프랑꼴이었습니다. 며칠 전까지의 주가와 비교해도, 이 은행이 오랫동안 받아 온 평가와 비교해도 한참 낮은 값이었습니다.
뒤를 받치는 장치도 함께 나왔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90억 프랑 규모의 손실 보증을, 중앙은행은 최대 1,000억 프랑의 유동성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겉으로는 민간 은행 두 곳의 거래였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신용이 뒤에서 떠받친 거래였습니다.
절차는 더 이례적이었습니다. 보통 이런 규모의 합병은 양쪽 주주총회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스위스 정부는 긴급 명령을 동원해 그 절차를 건너뛰었습니다. 자기 회사가 팔리는데, 주주들은 찬반을 표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인수는 그해 6월 12일 마무리됐습니다.
이 주말은 스위스 금융의 지형도 바꿔 놓았습니다. 오랫동안 두 큰 은행이 나눠 갖던 시장이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너무 커서 무너지게 둘 수 없는 은행을 처리하려다, 더 큰 은행을 만든 셈입니다. 이 문제를 두고 스위스 안에서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채권이 주식보다 먼저 사라진 날
이제 가장 뜨거웠던 대목입니다. 핀마는 같은 3월 19일, 크레디트스위스가 발행한 AT1 증권을 전액 상각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장부에서 아예 지워 버리라는 뜻입니다.
AT1(신종자본증권)은 조금 특이한 물건입니다. 겉모양은 채권이지만, 은행이 위기에 빠지면 이자 지급이 멈추거나, 원금이 주식으로 바뀌거나, 아예 없어질 수 있도록 미리 설계해 둔 증권입니다. 채권이면서 동시에 자본 역할을 하는 셈이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을 살리는 데 세금을 덜 쓰자는 취지로 널리 도입됐습니다.
사라진 금액은 약 160억 프랑, 당시 기준 170억 달러 남짓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금액보다 순서였습니다. 일반적인 상식과 대부분 나라의 제도에서는 은행이 망할 때 주주가 가장 먼저 손실을 보고, 채권 보유자는 그다음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주가 UBS 주식이라도 손에 쥔 반면, AT1 보유자의 몫은 0이 됐습니다.
파장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세계 AT1 시장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유럽 쪽 감독기구들은 며칠 만에 '우리 관할에서는 주주가 먼저 손실을 본다는 원칙이 유지된다'는 취지의 설명을 서둘러 내놓았습니다. 핀마는 계약서에 적힌 조건과 긴급 명령에 근거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고, 채권자들은 소송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2025년 10월 1일, 스위스 연방행정법원은 약 3,000명이 낸 소송에서 핀마의 상각 명령을 취소했습니다. 당시 이 은행이 자본 요건을 충족하고 있었으니 계약상 상각 요건이 갖춰지지 않았고, 명령을 뒷받침할 법적 근거도 충분하지 않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핀마는 10월 15일 연방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최종 결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167년과 사흘 사이
이 사건이 먼저 보여 주는 것은 지표와 신뢰 사이의 간격입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마지막 주까지 규제 자본 기준을 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무너졌습니다. 재무제표의 숫자는 회사의 건강을 재는 유용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계속 돈을 맡기고 싶어 하는지를 재는 저울은 아닙니다. 그 저울은 보고서 바깥에 있습니다.
'안전'이라는 말의 정체도 다시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채권은 주식보다 안전하다고 알고 있고, 대체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안전을 보장하는 건 상품의 이름이 아닙니다. 계약서에 적힌 조항, 그리고 위기 때 감독당국이 쓸 수 있는 권한이 결정합니다. 이름이 채권이라는 것만으로는 순서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사건은 가장 비싼 방식으로 보여 줬습니다.
시간의 문제도 있습니다. 이 은행의 운명은 금요일 저녁과 일요일 저녁 사이에 정해졌습니다. 그동안 시장은 닫혀 있었고, 투자자들이 판단하거나 대응할 틈은 없었습니다. 금융 사고의 결말이 대개 주말에 쓰이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시장이 열려 있는 동안에는 결론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67년과 사흘. 이 대비가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오래됐다는 것, 크다는 것,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은 신뢰의 근거가 될 수는 있어도 신뢰 그 자체는 아닙니다. 어떤 회사를 믿을 때 그 믿음이 정확히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한 번쯤 따로 적어 볼 만합니다. 오래됐다는 것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는지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