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는 이렇게 태어나 이렇게 망했습니다
2026-09-18 · 8분 읽기
어느 이사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 네일천 코르넬리스. 그녀가 청약 장부에 적어 넣은 금액은 100길더였습니다. 어느 회계원의 하인은 50길더를 냈습니다. 하루 품삯이 몇 푼에 지나지 않던 사람들이, 아직 출항하지도 않은 배들의 미래에 돈을 건 겁니다.
1602년 8월 31일, 암스테르담의 한 청약 창구가 문을 닫았습니다. 한 달 남짓 이어진 모집에 이 도시에서만 1,143명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명단에는 거상과 시의원만 있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한 하녀와 하인 같은 사람들도 섞여 있었죠.
이들이 받아 든 것은 금덩이도, 배의 지분을 나타내는 증표도 아니었습니다. 회사 장부에 자기 이름과 금액이 적혔다는 사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증권사 앱에서 숫자로 들여다보는 바로 그것, 주식입니다.
이 회사의 이름은 연합동인도회사. 네덜란드어 머리글자를 따 VOC라고 부릅니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를 낳은 회사입니다. 그리고 거의 200년 뒤, 갚을 수 없는 빚더미 위에서 문을 닫았습니다. 그 시작과 끝 사이에는 오늘날 주식시장이 겪는 거의 모든 일이 들어 있습니다.
배 한 척이 가라앉으면 집안이 끝나던 장사
17세기 초,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다녀오는 항해에는 왕복 2년 안팎이 걸렸습니다. 폭풍과 암초, 괴혈병, 해적, 현지 세력과의 충돌이 차례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떠난 배 가운데 상당수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대신 무사히 돌아온 배 한 척이 실어 온 후추와 정향은 출항 비용을 몇 배로 갚아 주었습니다. 성공하면 대박, 실패하면 파산. 그런 사업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비용을 누가 대느냐였습니다. 배를 사고, 선원을 모으고, 2년 치 식량과 교역 물자를 싣는 데 드는 돈은 웬만한 부자 한 사람이 감당할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감당한다 해도, 배가 가라앉는 순간 집안 전체가 끝납니다. 위험이 너무 커서 한 사람의 어깨에는 얹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당시 네덜란드 상인들은 항해 한 번마다 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여럿이 돈을 모아 배를 띄우고, 배가 돌아오면 물건을 팔아 원금과 이익을 나눈 뒤 해산하는 식이었죠. 보통 3년에서 4년이면 회사 하나의 일생이 끝났습니다.
위험은 나뉘었지만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먼 땅에 요새나 상관을 짓는 것 같은 장기 투자는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상한도 하한도 없던 1602년의 청약
이런 회사가 우후죽순 생기자 네덜란드 상인들끼리 경쟁이 붙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서로 비싸게 사들이고, 유럽에서는 서로 싸게 팔았습니다. 남는 게 있을 리 없었죠.
보다 못한 네덜란드 의회가 나섰습니다. 1602년 3월 20일, 여섯 도시의 회사들을 하나로 묶은 겁니다. 암스테르담, 미델뷔르흐, 델프트, 로테르담, 호른, 엔크하위전이 각각 지부가 됐고, 지부들이 뽑은 17명의 이사가 최고 의사결정 기구를 이뤘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17인 신사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자본금 모집은 그해 여름에 이뤄졌습니다. 최종적으로 모인 돈은 642만 4,588길더. 그중 암스테르담 지부 한 곳에서만 367만 4,945길더가 들어왔습니다. 전체의 57퍼센트를 한 도시가 댄 셈입니다.

정말 새로웠던 건 금액이 아니라 조건이었습니다. 특허장은 이 땅의 모든 주민이 참여할 수 있다고 적었고, 최소 금액도 최대 금액도 두지 않았습니다. 하녀와 하인이 주주 명부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위험을 나눠 질 사람의 수와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은 것. 이것이 주식회사라는 발명의 핵심이었습니다.
회사의 수명도 달라졌습니다. 의회는 21년짜리 특허장을 내줬고, 10년이 지난 1612년에 한 차례 회계를 정리해 원하는 주주에게 출자금을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항해 한 번이 아니라, 세대 단위로 돈이 묶이는 구조가 처음 생겨난 겁니다.
'팔 수 있다'는 한 줄이 시장을 만들다
10년은 긴 시간입니다. 그사이 돈이 급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청약 장부에는 이런 취지의 문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회사 회계원의 장부를 고쳐 적는 방식으로, 이사의 확인을 받아 지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다.
짧은 한 줄입니다. 하지만 이 문장이 사실상 세계 최초로 주식의 유통을 공식 보장했습니다.
그 순간 시장이 태어났습니다. 회사에 돈을 돌려 달라고 하지 않아도, 사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언제든 현금으로 바꿀 수 있게 된 거죠. 사람들은 회사 사무실 앞과 다리 위, 교회 마당에서 값을 흥정하기 시작했습니다. 1611년에는 이 거래를 담을 거래소 건물이 암스테르담에 세워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증권거래소의 조상입니다.
값이 오르내리자 곧바로 지금과 똑같은 기법들이 등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사크 르 메르입니다. 회사 설립에 참여했다가 이사들과 틀어진 그는 1609년, 열 명 남짓한 동업자를 모았습니다.
이들은 아직 갖고 있지도 않은 주식을 나중에 넘겨주기로 하고 미리 팔았습니다. 값이 떨어져야 이익이 나는 거래, 바로 공매도입니다. 값이 내릴 것으로 보고 없는 물건을 먼저 판 뒤, 나중에 싸게 사서 갚는 방식이죠.
이들은 회사에 대한 나쁜 소문까지 퍼뜨리며 값을 끌어내렸습니다. 결국 1610년 2월 27일, 네덜란드 의회는 없는 주식을 파는 행위를 금지하는 포고를 내렸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증권시장 규제로 꼽히는 문서입니다. 명분은 배당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과부와 고아를 보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효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거래자들은 계약서에 '이 금지령에 따른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조항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규제를 슬쩍 빠져나갔습니다.
배당이 후추와 정향으로 나오던 시절
주주들은 오래 기다려야 했습니다. 첫 배당 시점은 자료에 따라 설립 7년 뒤인 1609년 8월로도 적히지만, 실제 지급은 그보다 늦었고 그마저 현금이 아니었습니다. 1610년 4월에는 액면 1,000길더짜리 주식을 가진 사람이 750길더어치의 메이스를 받아 갔습니다. 메이스는 육두구 껍질로 만든 향신료입니다. 받은 사람들은 대개 그 향신료를 유럽 각지에 되팔아 현금을 만들었습니다.
현물 배당은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1630년대와 1640년대에는 정향으로 지급된 적이 여러 번 있었고, 배당이 주로 현금으로 바뀐 것은 1646년 이후입니다. 지급 주기도 들쭉날쭉했습니다. 1623년 이후에는 2년에 한 번, 1635년부터는 대체로 해마다 또는 반년마다 나왔습니다.
성과 자체는 화려했습니다. 1630년부터 1670년까지 이어진 전성기, 배당은 자본금 대비 평균 18퍼센트 안팎에 이르렀습니다. 1602년 청약에 100길더를 넣고 받은 배당을 계속 다시 넣었다면, 17세기가 끝날 무렵 6만 5,000길더를 넘겼으리라는 계산도 있습니다.
비교해 보면 더 또렷합니다. 1603년부터 1697년까지 연평균 수익률은 8.69퍼센트. 같은 시기 채권 이자율은 4퍼센트에서 6.25퍼센트였습니다.
주가도 올랐습니다. VOC 주식은 1720년대에 액면의 여섯 배가 넘는 642 수준까지 값이 매겨졌습니다. 그런데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배당이 가장 후했던 시기와 주가가 가장 높았던 시기가 서로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회사의 실제 사정과 시장의 기대는 자주 어긋나고, 그 틈이 벌어질수록 뒤에 오는 조정은 깊어집니다.
군대와 조약 체결권을 가진 회사
VOC가 오늘날의 어떤 기업과도 달랐던 점은 특허장에 적힌 권한이었습니다. 회사는 전쟁을 벌이고,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고, 자기 이름으로 화폐를 찍고, 요새와 식민지를 세우고, 사람을 가두고 처형할 권한까지 받았습니다. 국가가 할 일을 민간 회사에 통째로 맡긴 겁니다.
규모도 국가에 가까웠습니다. 1669년 무렵 VOC는 상선 150척 이상과 군함 40척, 직원 5만 명, 1만 명 규모의 사병을 거느렸습니다. 1602년부터 1796년까지 4,785척의 배가 아시아로 향했고, 그 배에 오른 유럽인은 100만 명에 가까웠습니다.

이 힘이 어디에 쓰였는지도 함께 적어 둬야 공정합니다. 회사는 향신료의 독점 가격을 지키려고 산지의 생산과 유통을 무력으로 통제했고, 그 과정에서 아시아 여러 지역 주민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오늘날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VOC는 상업의 역사가 아니라 식민의 역사로 기억됩니다.
주주에게 돌아간 18퍼센트의 배당. 그 뒤에는 장부에 적히지 않은 비용이 있었습니다.
부패 속에 가라앉다
몰락은 천천히 왔습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향신료로 남기는 이익이 얇아졌고,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 회사들이 같은 항로에 뛰어들었습니다. 아시아 현지에서는 직원들이 회사 깃발을 단 채 자기 장사를 하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1750년대, 17인 이사회는 자금난을 이유로 급여를 깎으면서 대신 직원들의 사적 거래를 눈감아 주는 쪽을 택했습니다. 부패를 아예 제도로 인정해 버린 셈입니다.
결정타는 전쟁이었습니다. 1780년부터 1784년까지 이어진 제4차 영란전쟁에서 VOC는 함대의 절반가량을 잃었고, 4,300만 길더에 이르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항로가 끊기자 아시아의 창고에는 팔지 못한 물건이 쌓여 갔습니다.
여기서 회사는 치명적인 선택을 합니다. 이익이 나지 않는데도 배당을 계속 준 겁니다. 그 배당의 재원은 빌린 돈이었습니다. 주가와 평판을 지키려고 빚을 내 주주에게 돈을 나눠 주는 구조가 수십 년 이어졌습니다. 회사의 속은 이미 오래전에 비어 있었습니다.
1799년 12월 31일, VOC의 특허장은 연장되지 않았습니다. 회사는 해산했고, 자산과 부채는 네덜란드 정부가 떠안았습니다. 회사가 지배하던 땅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식민지가 됐습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VOC라는 머리글자에 '부패 속에 가라앉았다'는 뜻의 말장난을 지어 붙였습니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는 그렇게 197년 만에 사라졌습니다.
400년 전 청약 창구가 남긴 질문
VOC가 남긴 첫 번째 물음은, 애초에 주식이라는 물건이 왜 생겼느냐입니다. 답은 단순합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여러 사람이 잘게 나눠 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주식은 대박을 나누는 도구이기 전에, 파산을 나누는 도구였습니다. 지금 계좌에 찍힌 숫자도 본질은 같습니다. 얼마를 벌 수 있느냐보다, 어떤 위험을 얼마나 떠안고 있느냐가 먼저입니다.
유동성에는 두 얼굴이 있다는 점도 남습니다. '언제든 팔 수 있다'는 한 줄 덕분에 사람들은 안심하고 돈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덕분에 소문과 공매도와 투기도 함께 태어났습니다. 1610년의 금지령이 계약서 한 줄로 무력해지는 장면은 4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낯설지 않습니다. 시장의 편리함과 시장의 소란은 같은 뿌리에서 자랍니다.
배당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따져 봐야 합니다. VOC의 마지막 수십 년은 이익이 아니라 빚에서 나온 배당이 회사를 어떻게 갉아먹는지 보여 줍니다. 겉으로 보이는 숫자 하나로는 그 돈이 벌어서 준 것인지, 빌려서 준 것인지 구분되지 않습니다. 돈의 출처를 묻는 습관은 오늘의 투자자에게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마지막은 감시의 문제입니다. 17인의 이사는 사실상 주주의 견제를 받지 않았고, 현지 직원들은 본사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습니다. 군대와 조약 체결권까지 쥔 거대한 조직을 무너뜨린 것은 바깥의 적이 아니라 안쪽의 느슨함이었습니다. 좋은 사업과 좋은 회사는 다른 말이고,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대개 지배구조입니다.
하녀 네일천이 100길더를 적어 넣던 날, 그녀가 산 것은 배의 미래였을까요, 회사의 미래였을까요. 400년 전 암스테르담 청약 창구 앞에서 시작된 그 질문은, 지금도 모든 주주 앞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