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코가 벗겨지던 시절의 법칙
2026-09-17 · 8분 읽기
왕의 코가 벗겨지고 있었습니다. 16세기 중반 영국 사람들의 손에 들린 동전에는 헨리 8세의 옆얼굴이 새겨져 있었는데, 몇 달 만지작거리다 보면 코 부분이 가장 먼저 닳았습니다. 도드라진 자리라 마찰이 많았던 탓이죠.
은도금이 벗겨진 자리에서 드러난 건 붉은 구리였습니다. 사람들은 왕에게 별명을 붙였습니다. 구리코, 올드 코퍼노즈.
그럴 만했습니다. 1544년부터 1551년까지 영국 왕실은 은화에 든 은의 양을 조직적으로 줄였습니다. 원래 은화는 은이 92.5퍼센트인, 이른바 스털링 순도였습니다. 그런데 1551년에 이르자 은은 25퍼센트만 남았고 나머지는 구리였습니다.

역사는 이 시기를 대저질화, 영어로 그레이트 디베이스먼트라고 부릅니다. 전쟁 비용을 대려고 같은 양의 은으로 더 많은 동전을 찍어 낸 겁니다.
이때 영국인들의 행동은 놀랍도록 한결같았습니다. 예전에 만든 은 함량 높은 동전은 장롱 속으로 들어갔고, 시장에서 오가는 건 구리가 비치는 새 동전뿐이었습니다. 이 현상을 한 줄로 압축한 것이 그레셤의 법칙,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입니다.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는 뜻이죠.
그런데 이 유명한 문장에는 반드시 따라붙어야 할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인용될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도 바로 그 전제입니다.
법칙에 이름을 빌려준 상인
토머스 그레셤은 1519년경 런던에서 태어나 1579년 11월 21일 세상을 떠난 상인이자 금융가였습니다. 그는 당시 유럽 금융의 중심지였던 안트베르펜에 머물며 영국 왕실의 자금을 조달하는 대리인 노릇을 했습니다.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그는 네 명의 군주 아래에서 일했습니다. 왕이 바뀌어도 돈 빌려 오는 일을 맡길 사람은 그밖에 없었던 셈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한 1558년, 그레셤은 새 여왕에게 편지를 씁니다. 좋은 돈과 나쁜 돈은 함께 유통될 수 없다는 취지의 조언이었습니다. 화폐를 망가뜨려 놓으면 환율이 나빠지고 왕실이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워진다는, 지극히 실무적인 이야기였죠.
조언은 실제 정책이 됐습니다. 1560년 엘리자베스는 저질 동전을 거둬 녹이고 제대로 된 순도의 새 동전으로 바꾸는 대개주, 즉 대대적인 동전 재주조를 단행했고 그 실무를 그레셤이 맡았습니다.
그레셤은 1565년 사재를 털어 런던에 상인들이 모여 거래할 건물을 짓겠다고 나섰고, 그 건물은 1571년 문을 열었습니다. 훗날 '왕립 거래소'로 불린 곳입니다. 그가 유언으로 남긴 재산을 바탕으로 1597년에는 런던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그레셤 칼리지가 세워졌습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무료 공개강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작 재미있는 대목은 여기부터입니다. 그레셤 자신은 이 법칙을 정식으로 정리한 적이 없습니다. '그레셤의 법칙'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300년 가까이 지난 19세기 중반의 경제학자 헨리 더닝 매클라우드였습니다. 그는 옛 기록에서 그레셤의 조언을 찾아내 그 이름을 법칙에 붙였습니다. 이름값은 이름을 붙인 사람이 만들어 준 셈입니다.
기원전 사람들도 알던 일
현상 자체는 훨씬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기원전 405년 아테네에서 상연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개구리'에는, 좋은 화폐는 사라지고 질 나쁜 동전만 돌아다닌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정치인을 고르는 일도 마찬가지라는 풍자였습니다. 2,400년 전 관객들이 이 대목에서 웃었다는 건, 그 이야기가 이미 상식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뒤로도 같은 관찰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14세기 프랑스 학자 니콜 오렘은 화폐 변조를 다룬 논고에서 같은 원리를 짚었습니다. 지동설로 더 유명한 코페르니쿠스도 1519년 폴란드 화폐 문제를 다루며, 질 나쁜 주화가 좋은 주화를 유통에서 몰아낸다고 썼습니다.
이슬람 학자 이븐 타이미야는 저질 화폐를 발행하는 통치자가 결국 자신이 가진 부를 망친다고 지적했습니다. 15세기 이탈리아 상인의 편지에도 나쁜 돈이 좋은 돈을 쫓아낼 거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로마 제국입니다. 은화 데나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은 함량이 97퍼센트를 넘었습니다. 네로가 64년에 손을 대면서 93.5퍼센트로 내려갔고, 그 뒤로 내리막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3세기 초에는 80퍼센트대로, 다시 50퍼센트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215년 카라칼라 황제는 새 은화 안토니니아누스를 내놓으며 데나리우스 두 개 값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무게는 두 배에 한참 못 미쳤고, 은 함량은 52퍼센트 남짓이었습니다. 액면만 두 배였던 거죠.
3세기 중반 갈리에누스 시대에 이르면 안토니니아누스는 사실상 구리 동전에 은을 얇게 입힌 물건이 돼 있었습니다. 그사이 옛 고순도 은화들은 땅속 항아리로 숨어들었습니다. 오늘날 고고학 발굴에서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게 바로 그 동전들입니다.
빠뜨리면 안 되는 단 하나의 조건
이제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일은 아무 때나 일어나지 않습니다. 두 동전이 법으로 정해진 같은 액면가로 강제 통용될 때에만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은이 90퍼센트 든 1실링과 25퍼센트 든 1실링이 있습니다. 법은 둘 다 똑같은 1실링으로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레셤의 법칙은 바로 이 명령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 조건에서 사람들의 선택은 뻔합니다. 물건값을 치를 때는 어차피 같은 1실링으로 쳐주니 나쁜 동전을 내밉니다. 좋은 동전은 녹여 팔거나, 해외에서 쓰거나, 그냥 넣어 둡니다. 좋은 동전은 액면가보다 소재 가치가 더 크니 시장에 내놓을 이유가 없죠. 그렇게 시장에는 나쁜 동전만 남습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먼델은 이 점을 짚어 법칙을 다시 썼습니다. 악화는 같은 가격에 교환될 때에만 양화를 몰아낸다.
전제를 걷어 내면 결과는 곧바로 뒤집힙니다. 법이 강제하지 않아 상인이 나쁜 동전을 반값으로만 쳐준다면, 굳이 나쁜 동전을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때부터는 시장이 알아서 품질을 가격에 반영하고, 오히려 좋은 돈이 널리 쓰입니다. 강제된 교환 비율이라는 말뚝이 뽑히는 순간, 법칙은 작동을 멈춥니다.
아예 이름이 붙은 반대 현상도 있습니다. 프랑스 정치가의 이름을 딴 '티에르의 법칙'입니다. 악화가 지나치게 나빠져 사실상 아무 가치가 없어지고 법적 강제마저 무너지면, 이번에는 양화가 악화를 몰아냅니다. 1923년 바이마르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때 사람들이 마르크화 받기를 거부한 일, 2009년 짐바브웨에서 자국 통화가 버려지고 외국 화폐가 그 자리를 채운 일이 그 예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법칙은 전제가 빠진 채 인용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질 낮은 콘텐츠가 좋은 콘텐츠를 밀어냈다거나, 시끄러운 주장이 차분한 주장을 몰아냈다거나 하는 식이죠. 비유로는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법칙의 이름을 빌려 오려면, 법이 강제한 동일 가격이라는 조건이 그 상황에도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그 조건이 없다면 그건 그레셤의 법칙이 아닙니다. 그저 나쁜 것이 잘 팔린다는 관찰일 뿐입니다.
20세기 미국에서 되풀이된 장면
옛날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미국은 1965년 주화법으로 은화의 은 함량을 크게 낮췄습니다. 10센트와 25센트 동전에서는 은을 아예 뺐고, 50센트 동전은 90퍼센트였던 은 함량을 40퍼센트로 줄였습니다. 액면가는 그대로였습니다.
결과는 16세기 런던과 똑같았습니다. 은이 들어간 옛 동전은 몇 년 만에 유통에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자판기에 넣을 동전과 서랍에 넣어 둘 동전을 가려 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40퍼센트짜리마저 자취를 감췄습니다. 은값이 오를수록 소재 가치와 액면가의 차이가 벌어졌고, 그만큼 내놓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2006년에는 미국 정부가 1센트와 5센트 동전을 녹이거나 대량으로 해외에 내보내는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구리와 아연 값이 오르면서, 동전을 녹여 팔면 액면가보다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동전을 물건으로 보기 시작하면 화폐는 화폐 노릇을 그만둡니다. 수백 년 전 런던에서 벌어진 일이 조폐국 문서로 되풀이된 셈입니다.
여기서도 조건은 똑같습니다. 법이 1센트를 1센트로 받으라고 정해 뒀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동전 가게에서 옛 은화를 은값대로 쳐주는 게 일상이었다면 애초에 숨길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오늘날 옛 은화는 화폐가 아니라 수집품으로, 소재 가치대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중고차 시장으로 건너간 법칙
이 원리가 화폐 바깥으로 건너간 대표적인 사례가 중고차입니다. 1970년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는 '레몬 시장'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영어에서 레몬은 겉은 멀쩡한데 속은 고장투성이인 차를 가리키는 속어입니다.
애컬로프가 주목한 건 파는 사람은 차 상태를 아는데 사는 사람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른바 정보 비대칭이 시장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설명한 겁니다.
논리는 이렇습니다. 사는 사람은 좋은 차와 레몬을 구별할 수 없으니 평균적인 값만 부릅니다. 그러면 정말 좋은 차를 가진 사람은 제값을 못 받으니 시장에 내놓지 않습니다. 남은 물건의 평균 품질이 떨어지고, 사는 사람은 값을 더 낮추고, 그러면 그다음으로 괜찮은 차가 또 빠져나갑니다. 좋은 물건이 차례차례 사라지는 구조입니다.
겉모양은 그레셤의 법칙과 닮았습니다. 좋은 것은 숨고 나쁜 것만 남죠. 하지만 작동 원리는 다릅니다. 동전에서는 법이 같은 값을 강제해서 생긴 일이고, 중고차에서는 정보가 없어 시장이 같은 값을 매길 수밖에 없어서 생긴 일입니다. 강제된 동일 가격이냐, 무지에서 비롯된 동일 가격이냐의 차이입니다.
애컬로프는 이 연구로 2001년 마이클 스펜스,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습니다.
처방도 그 차이에서 나옵니다. 동전 문제는 법이 만든 것이니 개주처럼 제도를 바꿔야 풀립니다. 중고차 문제는 정보의 문제이니 정보를 채워 넣어야 풀립니다. 사고 이력 조회, 정비 기록, 제조사 인증 중고차, 보증 기간 같은 장치가 모두 그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품질을 증명할 방법이 생기면 좋은 물건은 시장으로 돌아옵니다.
짧은 경구일수록 전제를 묻는다
그레셤의 법칙은 사람이 나빠서 생기는 현상이 아닙니다. 똑같이 대접받는 두 가지가 있을 때 값나가는 쪽을 아끼는 건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문제는 그런 판단이 모이면 시장 전체에서 좋은 것이 사라진다는 데 있습니다.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이 전체로는 나쁜 결과를 낳는 구조. 경제학이 오래 붙들어 온 주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투자자가 곱씹을 만한 건 구별이 안 될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시장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지 못하면 좋은 쪽이 먼저 빠져나갑니다. 어떤 분야에서 괜찮은 것들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면, 그 시장에 품질을 가격에 반영할 장치가 없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좋은 물건이 나오지 않는 시장을 볼 때는 물건을 탓하기 전에 값을 매기는 방식부터 볼 일입니다.
유명한 경구일수록 전제를 확인하는 습관도 필요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열 글자는 외우기 쉽고 어디에나 갖다 붙이기 좋습니다. 하지만 법정 교환 비율이라는 조건이 빠지면 성립하지 않고, 조건이 사라지면 아예 거꾸로 뒤집히기까지 합니다.
짧고 근사한 문장을 만났을 때, 그 문장이 성립하려면 무엇이 참이어야 하는지 되물어 보는 것. 왕의 코가 구리로 벗겨지던 500년 가까이 전의 동전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실용적인 조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