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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을 사재기한 형제, 하루 만에 반토막 난 은값

1980년 3월 27일 목요일, 뉴욕상품거래소. 온스당 21.62달러이던 은 가격이 10.80달러로 주저앉았습니다. 하루 만에, 정확히 절반이 날아간 겁니다. 불과 두 달여 전만 해도 온스당 50달러 선을 찍었던 금속이었습니다. 시장은 그날을 실버 서스데이, 은의 목요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월가가 걱정한 건 은값만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한 주요 증권사가 특정 고객의 계좌에서 1억 2천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고객이 끝내 돈을 내지 못하면 증권사 자체가 쓰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제의 고객은 텍사스의 두 형제였습니다. 넬슨 벙커 헌트와 윌리엄 허버트 헌트. 아버지 H.L. 헌트가 석유로 쌓은 재산을 물려받은 이들은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에는 열세 개 은행이 급히 모아 준 11억 달러짜리 구제 대출로 간신히 숨을 쉬는 처지가 됩니다.

이들은 어떻게 세계 은의 상당 부분을 손에 넣었을까요. 그리고 어쩌다 그 많은 은을 쥔 채로 파산에 이르렀을까요. 이 이야기에는 종이돈에 대한 불신, 금속 덩어리를 비행기에 실어 나른 집착,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규칙을 바꾼 거래소가 모두 등장합니다.

형제는 왜 금이 아니라 은을 샀을까

헌트 형제의 출발점은 투기가 아니라 공포였습니다. 1970년대 미국은 물가가 해마다 두 자릿수를 넘나드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1974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1퍼센트. 월급을 모아 은행에 넣어 두면 가만히 앉아서 구매력이 깎여 나가던 시절입니다. 종이돈을 믿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손에 쥘 수 있는 실물 자산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은 금이었겠죠.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개인이 금덩이를 마음대로 갖고 있는 것 자체가 법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1933년부터 이어진 금 보유 금지 조치는 1975년 1월이 돼서야 풀렸습니다. 반면 은에는 처음부터 아무런 제약이 없었습니다. 형제가 은으로 방향을 튼 첫 번째 이유는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이 단순한 규제의 차이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은이 금과 달리 실제로 쓰이는 금속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은은 사진 필름을 만드는 데 대량으로 들어갔고, 전자부품과 식기, 보석에도 쓰였습니다. 캐내는 양보다 쓰는 양이 많으면 언젠가 값은 오를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었죠.

형제는 1970년대 초반, 온스당 2달러도 안 되는 가격에 은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 초에는 이미 5천만 온스 안팎을 쥐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신념이 뚜렷한 장기 투자자의 모습입니다. 판단이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실제로 1970년대 은값은 꾸준히 올랐고, 형제의 예측은 방향만큼은 맞았으니까요. 문제는 그다음, 맞는 판단을 어떤 방식으로 밀어붙였느냐에 있었습니다.

보잉 707 세 대에 실려 스위스로 간 은

형제가 보통 투자자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건 선물 계약을 다루는 방식이었습니다. 선물이란 미래의 특정 시점에 정해진 가격으로 사고팔기로 미리 약속해 두는 계약입니다. 대부분의 투자자는 만기가 오면 계약을 다음 달로 넘기거나 차액만 정산하고 끝냅니다. 실물을 받아 창고에 쌓아 둘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헌트 형제는 그 실물을 전부 받아 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에는 보잉 707 화물기 세 대를 전세 내 은괴를 스위스로 날랐습니다. 미국 정부가 언젠가 은마저 압류할지 모른다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 은이 빠져나가자 거래할 수 있는 실물이 말라 가기 시작했고, 이것이 값을 끌어올리는 또 하나의 엔진이 됐습니다.

표면이 울퉁불퉁한 주조 은괴
스코츠데일 실버가 주조한 은괴. 표면에 물결 자국이 남아 있다.Eric Golub · CC BY 2.0 · 위키미디어 공용

1979년 들어 사들이는 규모가 부쩍 커졌습니다. 형제는 사우디아라비아 쪽 유력 투자자들과 손잡고 국제금속투자회사라는 합작 법인을 세워 자금을 보탰습니다. 공동 출자자 가운데는 사우디 왕실과 혼인으로 이어진 사업가 마흐무드 푸스툭도 있었습니다.

숫자는 빠르게 불어났습니다. 1979년 7월 말 형제가 지배하던 은은 약 1억 2,300만 온스. 그해 말에는 1억 9,500만 온스에 이르렀습니다. 세계 민간 보유 은의 절반을 넘는 양이라는 추정까지 나왔습니다.

시장에서는 이런 행위를 매점, 영어로는 코너링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상품이 시장에 도는 물량을 한 손에 그러모아 값을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시도입니다. 형제는 인플레이션을 피하려는 장기 보유일 뿐이라고 설명했지만, 거래소와 규제 당국의 눈에는 전형적인 매점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매점에는 늘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따라붙습니다. 세상의 물량을 다 가진 사람은, 정작 팔고 싶을 때 사 줄 사람이 없다는 것.

온스당 6달러에서 50달러로

1979년 초 온스당 6달러 언저리이던 은은 그해 8월 10달러를 넘었습니다. 12월 31일에는 34.45달러로 한 해를 마감했죠. 그리고 1980년 1월 중순, 온스당 50달러 선까지 치솟았습니다. 1년 만에 여덟 배. 형제의 평가이익은 수십억 달러 규모로 불어났습니다.

값이 이 정도로 뛰면 사회 전체가 움직입니다. 미국 곳곳에서 집에 있던 은수저와 은쟁반, 은 액자를 들고 정련업체 앞에 줄을 서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할머니가 쓰던 식기 세트가 녹아 은괴로 바뀌었습니다.

은을 원료로 쓰는 기업들에게는 반대로 재앙이었습니다. 사진 필름과 보석, 식기를 만드는 업체들의 원가가 손쓸 수 없을 만큼 뛰었습니다. 보석 브랜드 티파니는 뉴욕타임스에 광고를 내고 대놓고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누군가 수십억 달러어치 은을 사재기해 값을 끌어올리고, 그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은제품에 터무니없는 값을 치러야 하는 상황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광고가 누구를 겨냥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형제는 투자자에서 정치적 표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몇몇 부자가 생활물가를 흔들고 산업 원가를 뒤집어 놓는다는 인식이 퍼지면, 시장의 규칙을 정하는 쪽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실제로 그 일은 몇 주 뒤에 벌어졌습니다.

거래소가 규칙을 바꾸다

1980년 1월 7일, 뉴욕상품거래소는 한 투자자가 보유할 수 있는 은 선물 계약 수를 제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훗날 실버 룰 세븐이라고 불리게 된 규정입니다. 동시에 증거금 요건도 크게 올렸습니다.

증거금은 선물을 거래할 때 거래소에 미리 맡겨 두는 보증금입니다. 가격이 불리하게 움직이면 돈을 더 넣어야 하는데, 이 추가 요구를 마진콜이라고 부릅니다. 이 제도 덕분에 작은 돈으로 큰 금액을 거래할 수 있습니다. 레버리지, 우리말로 지렛대 효과죠. 오를 때는 수익이 몇 배로 커지지만 내릴 때는 손실도 그만큼 커집니다. 무엇보다 손실이 나는 동안에는 계속 현금을 더 밀어 넣어야 합니다.

형제의 재산은 유정과 땅과 은괴였습니다. 당장 꺼내 쓸 수 있는 현금은 그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1월 21일, 거래소는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은 선물의 신규 매수를 사실상 막고, 이미 가진 계약을 정리하는 거래만 허용한 겁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습니다. 다음 날 은값은 하루에 10달러 가까이 빠지며 34달러 선으로 밀렸습니다. 사려는 사람을 제도로 없애 버린 시장에서 가격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준 장면이었습니다.

거래소 이사회에 은값이 떨어지면 이득을 보는 쪽 업계 인사들이 들어가 있었다는 점은 그 뒤로도 오래 논란거리였습니다. 다만 형제가 궁지에 몰린 이유를 규칙 변경 하나로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1월 이후에도 이들이 포지션을 줄이지 않고 버텼다는 데 있었습니다.

1980년 3월 27일, 실버 서스데이

3월 10일, 은값은 29.75달러까지 내려왔습니다. 값이 떨어질수록 마진콜 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었습니다. 3월 25일과 26일, 허버트 헌트는 거래하던 증권사들에 더 이상 추가 증거금을 낼 돈이 없다고 알렸습니다. 그 가운데 한 곳인 베이치 핼시 스튜어트 실즈의 헌트 계좌에는 담보 없는 미수금이 약 1억 2,200만 달러나 쌓여 있었습니다.

증권사들은 담보로 잡아 둔 은을 시장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값이 더 떨어지고, 마진콜이 더 커지고, 다시 더 많은 은이 쏟아져 나오는 악순환. 한번 돌기 시작한 바퀴는 누구도 멈춰 세우지 못했습니다. 3월 27일 은은 21.62달러에서 10.80달러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은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그 은 때문에 현금이 바닥나 무너지는 역설이 완성된 날입니다.

일은 형제 두 사람의 손실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형제에게 돈을 빌려준 증권사와 은행들이 줄줄이 흔들리면 금융 시스템 전체로 불이 번질 수 있었습니다. 연방준비제도가 상황을 지켜보는 가운데, 열세 개 은행이 모인 컨소시엄이 헌트 가문의 석유회사 플래시드 오일에 11억 달러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사태를 봉합했습니다.

담보로 잡힌 건 은이 아니었습니다. 유정과 가스전, 정유시설과 송유관이었습니다. 아버지 H.L. 헌트가 평생 일군 석유 자산이 아들들의 은 투자 손실을 메우는 담보로 들어간 겁니다. 형제 세 사람은 이 대출에 개인 보증까지 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법정과 파산, 그리고 그 뒤

구제 대출은 시간을 벌어 줬을 뿐입니다. 손실은 사라지지 않았고, 소송이 밀려들었습니다. 1988년 8월, 뉴욕의 배심원단은 헌트 형제와 국제금속투자회사 등이 사기와 상품거래법, 반독점법을 어겨 가며 1979년 은 시장을 조작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원고는 페루 국영 광물판매공사 민페코였습니다. 미국 법이 정한 배액 배상, 즉 손해의 몇 배를 물리는 규정이 적용되면서 배상액은 1억 3천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판결이 나온 그해 9월, 벙커와 허버트 헌트는 파산 보호를 신청했습니다. 텍사스 역사상 가장 큰 개인 파산 사건 가운데 하나로 남았습니다. 1989년에는 상품선물거래위원회와 합의해 1천만 달러의 벌금을 내고, 상품 거래에서 영원히 손을 떼게 됐습니다. 밀린 세금과 이자를 정리하는 별도의 합의도 뒤따랐습니다.

벙커 헌트는 그 뒤 경주마 사업에 남은 힘을 쏟으며 조용히 살았습니다. 그가 길러 낸 말 가운데 중요 대회 우승마가 158마리에 이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2014년 10월 21일, 여든여덟 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래소와 규제 당국에게 이 사건이 남긴 숙제는 분명했습니다. 한 참여자의 포지션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 자체가 시장 전체의 위험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위험은 가격이 무너지기 전에 미리 재야 한다는 것. 오늘날 선물 시장의 포지션 한도와 대규모 보유자 보고 제도는 상당 부분 이 시기의 경험 위에 세워졌습니다.

맞혔는데도 무너진 이유

헌트 형제는 방향을 틀리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에 화폐 가치가 깎여 나갈 거라는 전망도, 은값이 오를 거라는 전망도 결과적으로 맞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무너졌습니다. 맞는 판단과 살아남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이 사건은 가장 비싼 방식으로 보여 줍니다.

무너진 이유를 모아 보면 이렇습니다. 빌린 돈으로 산 자산은 값이 내릴 때 현금을 요구합니다. 시장의 규칙은 영원하지 않고, 특히 소수가 시장을 쥐고 흔들 때 바뀝니다. 그리고 너무 많이 가진 자산은 파는 순간 제 손으로 값을 깎아 내립니다.

마지막 것이 가장 잔인합니다. 내가 가진 양이 시장 전체에 비해 클수록, 내가 세워 둔 출구 계획은 실행하는 순간 쓸모가 없어집니다.

2021년 게임스탑 사태 때 많은 사람이 1980년의 은 시장을 떠올린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참여자도, 규모도, 수단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하지만 한쪽으로 몰린 매수세가 가격을 밀어 올리고, 거래 제한 조치가 들어오면서 흐름이 꺾이는 구조는 닮아 있었습니다. 사재기로 만들어 낸 가격은 결국 그 사재기가 멈추는 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세계 은의 절반을 살 일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 이야기에서 챙겨 갈 질문은 분명합니다. 어떤 자산이든 들어갈 때 나올 길을 함께 생각해 두었는가. 그리고 가격이 반대로 움직이는 동안 돈을 계속 더 넣어야 하는 구조에 들어가 있지는 않은가.

1980년 3월의 그 목요일이 지금도 자주 불려 나오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 두 질문이 46년이 지나도 조금도 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