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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가 약속한 주 15시간은 어디로 갔나

하루 세 시간, 일주일에 15시간. 1930년, 한 영국 경제학자가 백 년 뒤의 사람들에게 내다본 노동시간입니다. 그 백 년 뒤가 바로 2030년, 이제 겨우 4년 남짓 남았습니다.

이 예측이 나온 때를 떠올리면 더 기묘해집니다. 1930년, 세상은 무너지는 중이었습니다. 전해 가을 뉴욕 증시가 대폭락한 뒤 공장은 문을 닫았고 실업자는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신문마다 비관이 넘쳤고, 자본주의가 이대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진지하게 오갔습니다.

바로 그해, 기묘할 만큼 낙관적인 짧은 글 한 편이 발표됩니다. 제목은 '우리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 글쓴이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 훗날 거시경제학의 기초를 놓게 되는 인물입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킹즐리 마틴이 함께 있는 흑백 사진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킹즐리 마틴과 함께 찍은 사진.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그가 적어 둔 예측 가운데 하나는 놀라울 만큼 정확했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그 어긋남이 지금까지도 경제학자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비관의 한복판에서 쓴 낙관론

케인스가 이 글을 쓴 건 당시 유행하던 비관론을 반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의 불황을 보며 인류의 번영이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케인스는 그것이 시야의 문제라고 봤습니다. 경기 순환의 골짜기와 문명의 장기 추세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인류 역사의 긴 시간표를 펼쳐 보입니다. 기원전 2000년부터 18세기 초까지, 보통 사람의 생활 수준은 사실상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관찰이었습니다. 그러다 산업혁명 이후 복리로 쌓이는 자본 축적과 기술 진보가 시작되면서, 곡선이 갑자기 꺾여 올라갔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눈앞의 대공황은 무엇일까요. 케인스는 이를 류머티즘이 아니라 성장통에 가깝다고 표현했습니다. 몸이 망가진 게 아니라, 너무 빨리 자라느라 아픈 것이라는 진단이었죠.

그는 기술 발전이 일자리를 없애는 속도가 새 일자리를 만드는 속도를 앞지를 때 생기는 실업에 '기술적 실업'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요즘 인공지능을 두고 오가는 논의에서 자주 들리는 바로 그 개념입니다. 다만 케인스는 이것을 일시적인 조정으로 봤습니다. 길게 보면 생산 능력은 계속 불어날 것이고,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먹고사는 문제 자체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전망이었습니다.

하루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케인스가 내놓은 첫 번째 숫자는 생활 수준이었습니다. 진보한 나라의 생활 수준이 백 년 뒤에는 지금의 네 배에서 여덟 배 사이가 되어 있을 것. 꽤 대담한 예측이지만, 범위를 넓게 잡은 신중한 문장이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숫자가 바로 그 유명한 대목입니다. 그만큼 풍요로워진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죠. 하루 세 시간씩 교대하거나, 주 15시간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는 썼습니다. 그마저도 꼭 필요해서라기보다, 갑자기 할 일이 사라진 인간이 견디지 못할까 봐 남겨 두는 분량이라는 뉘앙스였습니다.

신문에 실린 케인스 캐리커처
1930년 6월 11일 스페인 일간지 「엘 솔」에 실린 바가리아의 케인스 캐리커처.루이스 바가리아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그때가 오면 인류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하게 될 거라고 케인스는 봤습니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가 아니라,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품위 있게 쓸 것인가. 그는 이것을 인류가 창조된 이래 처음으로 마주하는 진짜 문제라고 불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가치관도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돈 자체를 소유하려는 욕망은 병적인 것, 다소 혐오스러운 정신적 질환으로 여겨지게 될 거라고 적었습니다. 지금 읽어도 꽤 도발적으로 들리는 문장입니다.

절반은 정확히 맞았습니다

약속의 해가 코앞에 다가온 지금, 첫 번째 예측부터 채점해 보겠습니다. 미국의 1인당 실질 소득은 1930년 이후, 어떤 지표로 재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대여섯 배 수준으로 늘었습니다. 케인스가 말한 네 배에서 여덟 배라는 구간 안에 정확히 들어옵니다. 비관이 하늘을 찌르던 해에 쓴 예측치고는 놀라운 적중입니다.

한국은 그 변화가 훨씬 극적이었습니다. 1930년의 한반도와 지금의 대한민국 사이에는 백 년이 아니라 몇 세기가 놓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생산 능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케인스의 전망 자체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예측은 어떨까요. 노동시간이 줄어든 건 사실입니다. 1930년 무렵 산업 노동자의 연간 노동시간은 2,000시간을 훌쩍 넘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그보다 한참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서 독일은 1,300시간대까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주 15시간을 연간으로 환산하면 800시간이 채 안 됩니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23년 기준 1,872시간으로 여전히 회원국 가운데 상위권입니다. 미국은 1,800시간 안팎, 영국도 1,500시간대입니다.

줄긴 줄었지만, 케인스가 말한 지점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겁니다. 생산성은 약속대로 올랐는데, 여가만 배달되지 않은 셈입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일하는가

이 어긋남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흥미로운 건 어느 하나도 정답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대신 서로 다른 각도의 설명이 여러 겹 쌓여 있습니다.

첫 번째 설명은 케인스 자신의 글 안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두 종류로 나눴습니다. 남이 어떻든 상관없이 느끼는 절대적 욕구, 그리고 남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고 싶은 상대적 욕구입니다. 절대적 욕구는 언젠가 채워지겠지만 상대적 욕구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스스로 단서를 달아 두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그 단서의 무게를 과소평가했다는 데 있습니다. 상대적 욕구가 소비의 주된 동력이라면, 사회 전체가 아무리 부유해져도 만족은 영영 오지 않습니다. 옆 사람보다 나은 집과 차를 갖기 위한 경주에서는 모두가 달려도 순위가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철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 같은 연구자들이 이 지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두 번째 설명은 소비의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1930년의 풍요와 2020년대의 풍요는 품목부터 다릅니다. 스마트폰 요금, 각종 구독 서비스, 해외여행, 사교육처럼 케인스가 상상할 수 없었던 지출 항목이 계속 생겨났습니다. 사회학자 줄리엣 쇼어는 더 벌어서 더 쓰고, 더 쓰기 위해 더 일하는 순환 구조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일의 의미, 그리고 나눠 갖기

세 번째 설명은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 사람에게 일은 소득을 얻는 수단만이 아니라 정체성과 소속감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일을 줄이라고 하면 여가 대신 상실감이 찾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케인스도 이를 어렴풋이 걱정했지만, 사람들이 일 자체를 놓지 않으려는 힘이 이토록 강할 줄은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설명에는 냉소적인 변형판도 있습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2018년 펴낸 책에서, 현대의 상당수 일자리가 당사자조차 사회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업무로 채워져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생산성이 올라 남은 시간을 여가로 돌리는 대신, 굳이 새 업무를 만들어 채워 넣었다는 도발적인 해석입니다. 물론 설문에 기반한 주장이라, 측정 방식을 두고 반론도 많습니다.

네 번째 설명은 분배에 초점을 맞춥니다. 생산성이 오른 건 맞지만, 그 과실이 모두에게 같은 비율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소득 상위층과 자본 소유자에게 이익이 더 많이 쌓였다면, 중간과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케인스가 가정한 만큼 부유해지지 않았고, 따라서 일을 줄일 형편도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아이러니가 하나 붙습니다. 임금이 오를수록 한 시간을 쉬는 데 드는 기회비용, 즉 쉬느라 포기하는 돈도 함께 커진다는 점입니다. 시간당 보수가 높은 사람일수록 쉬는 게 비싸지니, 오히려 더 오래 일하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합니다. 케인스의 모형에는 이 반대 방향의 힘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네 가지 설명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겹쳐서 작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어느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합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는 논쟁입니다.

주 4일제, 뒤늦게 시작된 실험

그런데 최근 몇 해 사이, 케인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 4일제 실험입니다. 임금은 그대로 두고 근무일을 하루 줄여도 조직이 굴러가는지 확인해 보는 방식입니다.

가장 널리 인용되는 사례는 2022년 6월부터 12월까지 영국에서 진행된 대규모 시범 사업입니다. 61개 기업, 약 2,900명의 노동자가 참여했고 학계 연구진이 결과를 추적했습니다.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매출은 대체로 유지됐고, 번아웃을 호소하는 비율과 이직률은 눈에 띄게 낮아졌습니다. 시범 사업이 끝난 뒤 참여 기업의 92%가 주 4일제를 이어 가기로 했습니다.

아이슬란드에서도 2015년부터 몇 해에 걸쳐 공공 부문을 중심으로 노동시간 단축 실험이 진행됐고,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만 이 사례는 주 4일제가 아니라 주 35시간에서 36시간 수준으로 줄인 것이어서, 언론이 부풀려 전했다는 지적도 함께 따라붙습니다. 실험 결과를 읽을 때 무엇을 어떻게 바꿨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국도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2000년대 초반 주 5일제를 도입할 때는 경제가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우려가 컸지만, 제도는 자리를 잡았습니다. 2018년 7월부터는 3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주 52시간제가 단계적으로 적용됐습니다. 최근에는 주 4일제나 주 4.5일제 논의도 정치권과 기업 현장에서 오르내립니다.

다만 이런 실험에 참여하는 곳은 대개 사무직 중심의 조직입니다. 교대 근무가 필요한 제조 현장, 돌봄, 운송처럼 사람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일에서는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케인스가 그린 여가의 세계가 모두에게 동시에 오지는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숫자는 맞혔고, 사람은 빗나갔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케인스가 틀렸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숫자에서는 정확했는데 사람에서 빗나갔다는 점입니다. 기계가 얼마나 많은 것을 만들어 낼지는 거의 맞혔지만, 그렇게 풍요로워진 인간이 무엇을 원하게 될지는 읽어 내지 못했습니다.

예측이라는 일 전반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시장에도 온갖 장기 전망이 떠다닙니다. 기술이 어디까지 갈지, 어떤 산업이 커질지에 대한 예측은 의외로 잘 맞을 때가 있습니다. 정작 어긋나는 쪽은 그 기술을 손에 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한 예측입니다. 역사상 빗나간 전망 대부분은 기술을 과소평가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너무 단순하게 봐서 어긋났습니다.

2030년까지 이제 몇 해 남지 않았습니다. 주 15시간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습니다. 그러나 케인스가 던진 진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만큼 부유해진 사회는 그 풍요를 무엇과 바꾸고 있는가. 그 답을 대신 정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백 년 전의 약속이 배달되지 않은 이유가 기계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면, 한 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볼 만한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