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목록으로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만든 회사가 사라진 이유

1975년 겨울,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의 코닥 연구실. 스물넷의 신입 엔지니어가 이상한 물건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무게 3.6킬로그램에 토스터만 한 크기, 안에는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었습니다.

사진 한 장을 담는 데 23초가 걸렸습니다. 해상도는 가로세로 100픽셀, 요즘 단위로 0.01메가픽셀. 흑백이었고, 찍은 사진을 보려면 테이프를 다시 읽어 텔레비전 화면에 띄워야 했습니다.

엔지니어의 이름은 스티븐 새슨. 그가 들고 있던 건 세계 최초의 휴대형 디지털카메라였습니다. 필름이 한 장도 들어가지 않는 카메라였죠. 그는 훗날 경영진에게 이걸 보여 줬을 때의 반응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재미있긴 한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스티븐 새슨이 설계한 코닥 디지털카메라
스티븐 새슨이 코닥에서 설계한 디지털카메라.Bertrand Labévue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그로부터 37년 뒤인 2012년 1월, 필름이라는 단어와 거의 같은 뜻으로 통하던 이 회사는 뉴욕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습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만든 기술에 밀려서였습니다.

정답을 가장 먼저 손에 쥐고도 쓰지 못한 회사. 그리고 같은 시기, 전혀 다른 길을 걸은 경쟁자. 오늘은 그 두 회사 이야기입니다.

면도기를 공짜로 주는 회사

먼저 코닥이 어떤 회사였는지부터 보겠습니다. 1888년 창업자 조지 이스트먼이 내건 문구는 지금도 유명합니다.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합니다.

그때까지 사진은 전문가의 영역이었습니다. 코닥은 그걸 평범한 사람의 일상으로 끌어내렸습니다. 20세기 내내 미국 가정의 추억은 노란 상자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 회사의 돈 버는 구조는 흔히 면도기와 면도날에 비유됩니다. 카메라 본체는 싸게, 때로는 사실상 밑지고 팔았습니다. 대신 소비자가 평생 사게 되는 필름과 인화지, 현상 약품에서 돈을 벌었습니다.

카메라를 한 번 쥐여 주면 수십 년 동안 소모품 매출이 따라붙는 구조였죠. 마진이 매우 높았고, 경쟁자가 쉽게 따라오지 못하는 화학 기술이 그 마진을 지켜 줬습니다.

성적표는 압도적이었습니다. 1996년 코닥은 미국 필름 시장의 80% 이상을 쥐고 있었고, 그해 매출은 160억 달러 안팎으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전 세계 임직원은 그보다 앞선 1980년대 말에 이미 14만 명을 넘었습니다.

미국 학생들이 안정적인 직장 하면 떠올리던 회사였고, 로체스터라는 도시 자체가 이 회사를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로체스터의 이스트먼 코닥 공장과 본사
1900년 무렵 뉴욕주 로체스터의 이스트먼 코닥 공장과 본사.디트로이트 퍼블리싱 컴퍼니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바로 여기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새슨이 들고 온 물건은 기술로 보면 조악한 장난감이었지만, 사업으로 보면 회사의 심장을 겨눈 물건이었습니다.

디지털카메라가 퍼지면 필름이 안 팔립니다. 인화지도, 현상 약품도 필요 없어집니다. 회사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부문 전체가 사라진다는 뜻이었습니다.

서랍 속으로 들어간 특허

경영진이 이 기술을 내다 버린 건 아닙니다. 오히려 특허로 단단히 묶어 뒀습니다. 1977년 새슨과 동료 개릿 로이드의 이름으로 전자식 스틸 카메라 특허가 출원됐고, 코닥은 이후 디지털 이미징 분야에서 방대한 특허를 쌓아 올렸습니다. 연구는 이어졌고, 실험실에서는 늘 앞서 있었습니다.

다만 그걸 시장에 내놓는 데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코닥이 디지털을 몰랐다거나 무시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코닥은 1990년대 중반 일반 소비자용 디지털카메라를 내놓았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미국 시장에서 디지털카메라 점유율 1위를 차지한 해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팔아도 남는 돈이 없었다는 겁니다.

디지털카메라는 전자제품입니다. 전자제품 시장에서는 부품을 사다 조립해 파는 업체들이 순식간에 값을 끌어내립니다. 필름처럼 한 번 팔고 나서 계속 따라붙는 소모품도 없습니다. 카메라 한 대를 팔면 그걸로 끝이죠.

코닥은 매출이 큰 사업에서 이익이 거의 없는 사업으로 갈아타야 했습니다. 그것도 매 분기 실적 발표를 하면서요. 달리는 기차에서 다른 기차로 옮겨 타는 일과 비슷했습니다.

조직 안의 힘겨루기도 문제였습니다. 매출도, 인원도, 이익률도 가장 큰 쪽은 언제나 필름 부문이었습니다. 이익이 나지 않는 신사업이 예산 회의에서 잘 버는 기존 사업을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는 모두 합리적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그 합리적인 판단들이 모이자, 회사 전체가 한 방향에 묶여 버렸습니다.

특허로 버틴 시간

2000년대 들어 필름 시장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쪼그라들었습니다. 휴대폰에 카메라가 들어가기 시작하자 속도는 더 붙었습니다.

소형 카메라와 필름 카트리지
코닥 인스타매틱 카메라와 전용 필름 카트리지.Friedrich Haag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매출이 줄어드는 동안 코닥은 대규모 구조조정을 되풀이했습니다. 2005년 취임한 안토니오 페레스 최고경영자 시기를 전후해 수만 명이 회사를 떠났고, 공장들이 차례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 시기 회사를 떠받친 건, 얄궂게도 서랍 속에 쌓아 둔 특허였습니다. 디지털 이미징 특허를 다른 기업들에 빌려주고 받은 사용료가 2003년부터 2011년까지 30억 달러를 넘었습니다.

제 카메라를 팔아서가 아니라, 남들이 카메라와 휴대폰을 파는 데 쓰는 기술의 값을 받아 살아간 겁니다. 코닥은 애플과 림(블랙베리 제조사) 같은 회사를 상대로 특허 소송도 걸었습니다.

하지만 특허 사용료는 태생적으로 시한부입니다. 특허에는 만료일이 있고, 소송은 이길 때도 질 때도 있습니다. 2012년 여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는 애플을 상대로 한 코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버티게 해 주던 마지막 수입원마저 앞날이 흐려진 순간이었습니다.

2012년 1월 19일, 코닥은 ‘챕터 11’이라 불리는 파산보호를 신청했습니다. 회사를 곧바로 청산하는 절차가 아니라, 법원의 보호 아래 빚을 조정하고 사업을 다시 짤 시간을 버는 제도입니다.

코닥은 씨티그룹에서 9억 5천만 달러 규모의 자금을 끌어와 영업을 이어 갔습니다. 1888년부터 이어진 회사가 법원의 관리 아래 들어간 것입니다.

가장 아픈 숫자, 9,400만 달러

파산보호 절차에서 코닥은 자산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중 가장 값나가는 자산으로 꼽힌 게 바로 그 디지털 이미징 특허 묶음이었습니다.

외부 평가기관들은 이 특허 묶음의 가치를 18억 달러에서 45억 달러 사이로 내다봤습니다. 회사 안팎에서도 이 특허가 재기의 발판이 돼 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현실은 달랐습니다. 2012년 말, 애플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삼성, 아마존, 어도비 등 십여 개 기업이 컨소시엄을 꾸려 공동으로 사들였습니다. 이미징·인쇄 특허와 나머지 특허 사용권을 합쳐 낸 돈은 모두 5억 2,700만 달러.

특허 묶음 자체에 매겨진 값만 따로 떼어 보면 9,400만 달러에 그쳤습니다. 기대치의 극히 일부였습니다.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컨소시엄 명단에는 후지필름도 이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 필름 시장에서 맞붙어 온 회사가, 쓰러진 경쟁자의 특허를 나눠 사는 쪽에 서 있었던 겁니다.

코닥은 2013년 9월 파산보호에서 벗어났습니다. 다만 돌아온 모습은 예전과 달랐습니다. 소비자용 필름과 카메라의 거인이 아니라, 인쇄와 산업용 소재, 화학 분야에 집중하는 훨씬 작은 회사였습니다. 한때 14만 명을 넘었던 임직원은 이후 수천 명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같은 파도, 다른 결말

같은 무렵 일본에서는 후지필름이 똑같은 파도를 맞고 있었습니다. 사정이 더 나았던 것도 아닙니다. 2000년대 초 컬러필름 수요는 절벽처럼 무너졌습니다.

이 회사 경영진의 회고에 따르면, 현상소가 하루에 다루던 필름이 반년 만에 5천 통 수준에서 천 통 아래로 떨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회사 이익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부문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2000년대 초 회사를 이끈 고모리 시게타카는 두 가지를 동시에 밀어붙였습니다. 하나는 필름 사업을 필요한 만큼 줄이는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이었습니다. 공장을 닫고 현상소 네트워크를 정리하며 수천 명 규모의 인력을 줄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마련한 자원을 완전히 다른 곳에 쏟아붓는 일이었습니다. 줄이는 칼과 키우는 삽을 함께 든 셈입니다.

후지필름은 자기들이 가진 진짜 자산이 필름이 아니라 그 안에 든 기술이라고 다시 정의했습니다. 필름의 주원료인 콜라겐은 사람 피부의 주성분과 같은 물질입니다. 필름이 변색되지 않게 막는 항산화 기술은 피부 노화를 다루는 기술과 통했습니다.

수십 년간 쌓은 정밀 코팅 기술은 액정 패널용 필름과 반도체 소재로 이어졌습니다. 2007년 나온 화장품 브랜드 아스타리프트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회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의료와 제약 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었습니다. 2008년 제약사 도야마화학을 인수했고, 이후 바이오 의약품 위탁생산과 의료 영상 장비로 발을 넓혔습니다.

오늘날 이 회사에서 가장 큰 매출을 내는 부문은 사진이 아니라 헬스케어입니다. 필름을 만들던 회사가, 필름을 놓아주고도 살아남은 겁니다.

정답을 쥐고도 놓친 이유

코닥 이야기는 흔히 변화를 거부한 공룡의 우화로 소비됩니다. 그러나 실제 기록을 따라가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코닥은 기술을 가장 먼저 발명했고, 그 기술이 몰고 올 위협도 정확히 알았으며, 디지털 제품을 실제로 만들어 팔기도 했습니다.

모자랐던 건 정보나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잘 벌고 있는 사업을 제 손으로 무너뜨릴 결심이었습니다.

투자자에게 남는 질문도 여기서 나옵니다. 어떤 회사의 실적이 좋을 때, 그 좋은 실적이 회사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가. 이익률이 높은 사업일수록 내려놓기는 어려워집니다. 가장 잘 버는 부문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건 거의 모든 조직의 자연스러운 생리이니까요.

무엇을 파는 회사인가라는 정의도 갈림길이 됐습니다. 코닥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필름 회사로 여겼습니다. 후지필름은 위기 앞에서 스스로를 화학과 소재 기술을 가진 회사로 다시 정의했습니다. 같은 자산을 쥐고도, 그걸 무엇이라 부르느냐에 따라 갈 수 있는 길이 달라졌습니다.

특허나 브랜드 같은 무형자산을 보는 눈도 다시 생각해 볼 만합니다. 코닥의 특허는 한때 회사를 몇 년간 먹여 살렸지만, 막상 팔아야 할 때가 되자 기대치의 극히 일부로 정리됐습니다. 무형자산의 값은 파는 쪽이 아니라 사는 쪽이 정합니다. 그리고 급하게 팔아야 하는 쪽은 언제나 불리한 자리에 섭니다.

마지막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1975년 그 투박한 기계는 사진 한 장에 23초를 썼습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누구도 위협으로 느끼지 않을 만큼 느렸죠. 세상을 바꾸는 기술은 처음 나타날 때 대개 형편없어 보입니다.

지금 우스워 보이는 무언가가 20년 뒤에 무엇이 돼 있을지, 그 질문을 미루지 않는 것. 그게 남은 숙제입니다. 코닥은 미래를 가장 먼저 손에 쥐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서랍에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