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이 너무 커지면 폭탄이 됩니다
2026-09-22 · 8분 읽기
2012년 봄, 뉴욕의 몇몇 헤지펀드 트레이더들 눈에 이상한 움직임이 들어왔습니다. 미국 우량 기업들의 부도 위험을 사고파는 한 파생상품 지수에서, 누군가 혼자 시장을 밀어붙이고 있었던 겁니다. 하루 거래량의 절반 이상을 한 사람이 차지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시장 가격은 원래 수많은 참가자가 밀고 당기며 정해집니다. 그런데 이 지수에서는 저울 한쪽이 지나치게 무거웠습니다. 도대체 누가, 왜 이렇게 큰 물량을 쌓고 있는 걸까요.
정체는 곧 드러났습니다. 런던에서 일하던 JP모건의 트레이더 브뤼노 익실. 몸집이 너무 커서 숨을 수가 없다는 뜻으로, 시장 사람들은 그에게 '런던 고래'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2012년 4월 초 블룸버그와 월스트리트저널이 이 이야기를 기사로 내보내면서, 업계 은어였던 별명은 전 세계가 아는 이름이 됐습니다.

더 기묘한 것은 이 포지션의 원래 목적이었습니다. 돈을 벌려는 베팅이 아니라, 은행이 입을지 모르는 손실을 막으려고 만든 보험이었습니다. 손실 위험을 줄이려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 두는 거래를 '헤지'라고 부르는데, 바로 그 헤지가 끝내 62억 달러를 삼켰습니다. 금융위기를 가장 잘 헤쳐 나왔다는 은행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예금이 너무 많아서 생긴 부서
JP모건에는 최고투자책임자실, 영문 약자로 CIO라 불리는 부서가 있었습니다. 은행은 예금을 받아 대출로 굴리는데, 대출로 다 나가지 못하고 남는 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2011년 말 기준 이 부서가 관리하던 여유 자금은 약 3,500억 달러였습니다. 웬만한 나라의 국가 예산을 넘는 돈이 부서 하나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셈입니다.
부서를 이끈 사람은 이나 드루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제이미 다이먼 CEO의 신임을 받았고, CIO는 은행 안에서 상당한 자율을 누렸습니다. 부서의 공식 임무는 수익을 쫓는 것이 아니라 은행 전체의 위험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금리가 출렁이거나 기업들이 무더기로 부도를 낼 때, 은행이 받을 충격을 미리 줄여 두는 역할이었습니다.
그 임무를 위해 2006년에 만든 것이 '합성신용포트폴리오'라는 계정이었습니다. 은행이 기업들에 빌려준 돈이 워낙 많으니, 경기가 나빠져 부도가 쏟아질 때를 대비해 보험을 들어 두자는 발상이었습니다. 실제로 2008년 금융위기와 2011년 유럽 재정위기 때 이 계정은 제 몫을 했고, 꽤 큰 이익도 냈습니다. 문제는 그 성공이 다음 단계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보험 가입자가 보험을 팔기 시작하다
이 계정이 다룬 상품은 CDS(신용부도스와프)라는 파생상품이었습니다. 어떤 기업이 빚을 못 갚으면 대신 물어 주기로 하고, 그 대가로 정기적으로 보험료를 받는 계약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보험을 산 쪽은 기업이 망하면 돈을 받고, 판 쪽은 아무 일이 없으면 보험료를 챙깁니다. JP모건의 CIO는 원래 이 보험을 사는 쪽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험을 사기만 하면 보험료가 꾸준히 나갑니다. 2011년 말부터 경기가 살아날 조짐을 보이자 이 비용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CIO는 한쪽으로는 보험을 사면서 다른 쪽으로는 보험을 파는 구조를 겹겹이 쌓기 시작했습니다. 비용은 줄이고 보호 효과는 지키겠다는 계산이었죠. 하지만 이 조합은 장부상 균형만 맞을 뿐, 시장이 한쪽으로 쏠리면 걷잡을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덩치도 함께 불었습니다. 이 계정의 명목 금액은 2011년 말 약 510억 달러에서 2012년 3월 말 약 1,570억 달러로, 석 달 만에 세 배가 됐습니다. 명목 금액이란 실제로 오간 돈이 아니라 계약이 걸려 있는 기초 자산의 크기를 말합니다. 그래도 이 숫자가 클수록 가격이 조금만 불리하게 움직여도 손익이 크게 흔들린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숨을 수 없게 된 고래
이 정도로 커지자 시장이 먼저 눈치챘습니다. 익실이 주로 거래한 것은 미국 우량 기업 121곳의 부도 위험을 묶은 지수였는데, 그 지수의 하루 거래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컸습니다. 상대편 헤지펀드들은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이유를 짐작했고, 그 반대편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포지션의 치명적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크면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팔려고 내놓는 순간 가격이 더 떨어지고, 그러면 남은 물량의 평가손실이 커집니다. 시장이 그 사정을 알고 있다면 상대는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손실을 막으려던 보험이 스스로 과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포지션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었습니다. 손실이 나기 시작하자, 원래 방향이 맞다고 믿고 물량을 더 싣는 선택이 이어졌습니다. 개인 투자자가 떨어지는 종목을 더 사서 평균 단가를 낮추는 이른바 '물타기'와 심리적으로 똑같은 구조입니다. 다른 점은 규모가 수천억 달러 단위였다는 것뿐이었죠.
2012년 1분기 내내 손실은 조용히 쌓였습니다. 1월 말 1억 달러 수준이던 손실이 3월 말에는 5억 5,000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언론 보도로 포지션의 존재가 알려진 직후인 4월 10일, 하루에만 4억 1,500만 달러가 날아갔습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게 된 시장은 더 이상 자비롭지 않았습니다.
하룻밤 새 위험을 절반으로 줄인 계산법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대목은 여기서부터입니다. 은행은 위험을 숫자로 관리합니다. 대표적인 지표가 VaR(최대예상손실)로, 정상적인 시장에서 하루에 잃을 수 있는 최대 손실을 통계적으로 추정한 값입니다. 이 숫자가 정해진 한도를 넘으면 포지션을 줄이거나 승인을 다시 받아야 합니다. 2012년 1월, CIO가 이 한도를 넘겼습니다.
한도를 넘겼을 때 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포지션을 줄이거나, 숫자를 계산하는 방식을 바꾸거나. CIO는 1월 말 새 VaR 모델을 들여왔습니다. 그러자 똑같은 포지션의 위험 수치가 하룻밤 사이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포지션은 그대로인데 경보음만 꺼진 셈입니다. 그 뒤 거래 규모는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더 씁쓸했습니다. 새 모델은 검증 기간이 두 달에 불과했고, 계산의 일부는 사람이 손으로 다루는 스프레드시트에서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새 값에서 옛 값을 뺀 뒤 두 값의 '평균'으로 나눠야 할 자리에서, 수식이 두 값의 '합'으로 나누고 있었던 겁니다.
나누는 숫자가 커지면 결과는 작아집니다. 변동성은 실제보다 작게 계산됐고, 위험도 그만큼 줄어든 채 보고됐습니다. 은행은 2012년 5월 이 모델을 버리고 예전 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CIO의 위험 수치는 원래 수준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몇 달 동안 경영진이 보던 안심되는 숫자는, 존재하지 않는 안전이었습니다.
'찻잔 속의 태풍'이라던 손실
언론 보도가 나간 직후인 2012년 4월 13일, 제이미 다이먼은 1분기 실적 발표 자리에서 이 문제를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소한 소동이니 신경 쓸 것 없다는 뜻이었죠. 하지만 나중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그는 이 말을 할 때 이미 상당한 규모의 잠재 손실 가능성을 보고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은 5월 10일, JP모건은 긴급 전화회의를 열어 약 20억 달러의 손실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번에는 다이먼의 말이 달랐습니다. 형편없었고, 부주의했고, 판단이 틀렸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상처라는 표현도 썼습니다. 발표 다음 날 JP모건 주가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5월 14일 이나 드루가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20억 달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7월 13일 은행은 1분기 실적 자체를 고쳐 다시 공시했습니다. 트레이더들이 포지션의 평가 가격을 실제보다 유리하게 적어 손실을 줄여 보이게 했다는 내부 조사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상반기 누적 손실은 58억 달러로 불었고, 연말까지의 최종 집계는 약 62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계산서
미국 상원 상설조사소위원회는 2013년 3월 14일 300쪽에 가까운 조사 보고서를 내놓고, 다음 날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보고서의 지적은 날카로웠습니다. 위험 한도는 여러 차례 무시됐고, 한도를 넘자 모델이 바뀌었으며, 손실 규모는 경영진과 감독당국에 제때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 한 사람의 일탈이 아니라 조직 구조의 문제라는 결론이었습니다.
2013년 9월 19일, 미국과 영국 규제당국은 JP모건에 합계 약 9억 2,000만 달러의 제재금을 물렸습니다. 미국 SEC(증권거래위원회)가 2억 달러, 통화감독청이 3억 달러, 연준이 2억 달러, 영국 금융행위감독청(FCA)이 1억 3,761만 파운드였습니다.
눈여겨볼 점은 JP모건이 잘못을 인정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SEC는 대형 금융사와 합의할 때 잘못을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는' 방식을 관행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예외적인 사례로 기록됐습니다.
한 달 뒤인 10월 16일에는 상품선물거래위원회가 시세에 영향을 준 거래 행위를 문제 삼아 1억 달러를 추가로 부과했고, 여기서도 은행은 사실관계를 인정했습니다. 다이먼의 2012년 보수는 전년의 절반 수준인 1,150만 달러로 깎였고, 관련 임원들에게는 보수 환수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개인들의 결말은 다소 허무했습니다. 미국 검찰은 런던 사무소의 트레이더 두 명을 기소했지만 신병을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 2017년 7월 기소를 취하했습니다. 별명의 주인공 브뤼노 익실은 수사에 협조해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훗날 자신은 위에서 내려온 전략을 실행했을 뿐이며, '고래'라는 별명은 사실과 다르다는 취지로 공개 반박했습니다.
제도에도 흔적이 남았습니다. 이 사건은 은행이 자기 돈으로 위험한 거래를 하지 못하게 막는 규정을 둘러싼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헤지라고 부르면 허용되는데, 어디까지가 헤지이고 어디부터가 베팅인지를 누가 어떻게 가를 것인가. 런던 고래는 그 경계가 실무에서 얼마나 흐릿한지를 보여 준 살아 있는 사례가 됐습니다.
보험이 폭탄으로 바뀌는 순서
이 사건에서 가장 오래 기억할 것은 손실의 크기가 아니라, 그 손실이 처음 어떤 얼굴로 등장했는가입니다. 시작은 위험을 줄이겠다는 선의의 장치였습니다. 보험료가 아까워 구조를 손보고, 손실이 나자 만회하려고 판을 키우고, 판이 커지니 빠져나올 수 없게 됐습니다.
개인 투자자의 계좌에서도 똑같은 순서가 되풀이됩니다. 손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물을 타는 쪽이 언제나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숫자를 대하는 태도도 돌아볼 만합니다. 한도를 넘겼을 때 CIO가 고른 것은 포지션 축소가 아니라 계산 방식의 교체였습니다. 그 결과 위험이 줄어든 게 아니라 위험이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내 투자를 점검하는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준이 불편한 답을 줄 때마다 기준을 바꾸기 시작하면, 그 기준은 더 이상 나를 지켜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겸손입니다. JP모건은 금융위기를 가장 잘 견딘 은행으로 꼽혔고, 제이미 다이먼은 위험 관리의 모범으로 불리던 경영자였습니다. 그런 조직에서도 여러 겹의 통제 장치가 한꺼번에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잘 안다고 믿는 곳에서 가장 큰 사고가 난다는 것. 규모와 상관없이, 시장에 발을 들인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손실을 막으려고 든 보험도, 너무 커지면 그 자체가 폭탄이 됩니다. 2012년 런던의 고래가 62억 달러를 치르고 남긴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