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첫 최저임금법은 왜 남반구에서 나왔나
2026-09-19 · 8분 읽기
216달러. 미국 워싱턴주 웨너치의 캐스케이디언 호텔에서 객실 청소부로 일하던 엘시 패리시가, 일을 그만두며 회사에 청구한 돈입니다. 1933년 8월부터 1935년 5월까지 일한 몫이었습니다.
그의 논리는 간단했습니다. 주법이 정한 최저임금은 주 48시간에 14달러 50센트인데, 자신은 그보다 적게 받았으니 차액을 달라는 것. 호텔은 거절했습니다. 거절할 근거도 있었죠. 불과 열두 해 전, 미국 연방대법원이 최저임금법을 위헌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법이 있어도 그 법이 헌법에 어긋난다면 무효입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청소부의 소송은 결국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미국 노동법의 방향을 바꿔 놓습니다.
최저임금은 지금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처음부터 있던 제도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제도의 나이는 이제 겨우 130년 남짓입니다. 그리고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조용했던 적이 없습니다.
땀을 쥐어짜는 가게
19세기 후반 영국과 미국의 의류 산업에는 독특한 하청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큰 공장이 직접 옷을 만드는 대신 중간 업자에게 일감을 넘기고, 중간 업자는 다시 뒷골목의 작은 작업장이나 노동자의 집으로 일을 흩뿌리는 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작업장을 '스웨트숍'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동자의 땀(sweat)을 쥐어짜는 가게라는 뜻이죠.
스웨트숍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과 아동, 그리고 갓 도착한 이민자였습니다. 노동조합도 없었고, 일감을 거절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옆집 사람이 더 싼 값에 같은 일을 받아 가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공임을 깎아도 항의할 곳이 없는 구조였습니다.
1880년대 후반, 영국 의회가 이 문제를 놓고 대규모 조사에 나섭니다. 조사에서 드러난 실상은 당시 사회를 꽤 큰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문제는 해법이었습니다. 자선으로 풀자는 쪽, 노동조합을 키우자는 쪽, 그리고 아예 법으로 임금의 바닥을 정하자는 쪽으로 갈렸습니다.
마지막 주장은 당시로선 상당히 급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임금은 일하는 사람과 고용하는 사람이 알아서 정할 문제이고, 국가가 끼어들 영역이 아니라는 게 주류 견해였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급진적인 생각이 처음 법이 된 곳이 유럽도 미국도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첫 실험은 남반구에서 시작됐다
1894년, 뉴질랜드가 산업조정중재법을 만듭니다. 노사 분쟁을 중재 기구에 맡기고, 그 기구가 임금 수준까지 정할 수 있게 한 법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최저임금 고시와는 생김새가 달랐습니다. 그래도 국가 차원에서 임금의 하한을 강제할 통로를 처음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로 꼽힙니다.
2년 뒤인 1896년, 호주 빅토리아주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공장상점법을 고쳐 임금위원회를 만들고, 임금이 특히 낮다고 지목된 여섯 개 업종의 최저 임금을 정하게 한 겁니다. 애초에는 4년만 해 보는 한시적 실험이었습니다.
실험의 결과는 지지를 얻었고, 1904년 무렵 이 제도는 상설화됩니다. 그 뒤 적용 업종은 수십 개로 불어났습니다. 남반구의 작은 실험이 제도로 굳어진 순간입니다.
소식은 곧 북반구로 건너갔습니다. 영국은 1909년 무역위원회법을 만들어, 스웨팅이 심하다고 지목된 네 개 업종에 임금 결정 기구를 두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12년 매사추세츠주가 여성과 아동에 한정한 최저임금법을 처음 도입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이 제도가 뿌리내리기까지는 그 뒤로도 26년이 더 걸립니다.
막고, 또 막고, 마침내 돌아선 대법원
1923년, 연방대법원은 애드킨스 대 아동병원 사건에서 워싱턴 D.C.의 여성 최저임금법을 위헌으로 판결합니다. 근거는 '계약의 자유'였습니다. 얼마를 받고 일할지는 당사자끼리 정할 문제인데, 국가가 그 자유를 침해했다는 논리였죠.
당시 미국 대법원은 이른바 '로크너 시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계약의 자유를 헌법이 보호하는 핵심 권리로 보고, 노동시간 상한이나 임금 하한 같은 규제를 줄줄이 무효로 돌리던 시기를 말합니다. 애드킨스 판결은 그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대공황이 닥쳐 실업자가 거리에 넘치던 1936년에도 대법원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모어헤드 사건에서 뉴욕주의 최저임금법을 다시 위헌으로 판단한 겁니다. 뉴딜 정책을 밀어붙이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는 상당한 좌절이었습니다.
1937년 2월 5일, 루스벨트는 대법관 수를 늘릴 수 있게 하는 법원 개편안을 내놓습니다. 자기 편 대법관을 더 앉혀 판세를 뒤집겠다는 뜻으로 읽혔고, 여론과 의회의 거센 반발을 불렀습니다. 법안 자체는 끝내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937년 3월 29일, 엘시 패리시 사건의 판결이 나옵니다. 대법원은 5대 4로 워싱턴주의 최저임금법이 합헌이라고 선언하고, 애드킨스 판결을 정면으로 뒤집었습니다. 결정적이었던 건 오언 로버츠 대법관이 입장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이를 '아홉을 구한 때맞춘 변심'이라고 불렀습니다. 대법관 아홉 명으로 이뤄진 법원을 개편의 칼날에서 구했다는 뜻입니다. 다만 로버츠의 표결이 법원 개편안 발표보다 앞선 회의에서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그가 압박에 굴복한 것인지는 지금도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1938년, 시간당 25센트
헌법의 문이 열리자 입법은 빠르게 이어졌습니다. 1938년 6월 25일, 루스벨트가 공정근로기준법에 서명합니다. 전국에 적용되는 최저임금을 시간당 25센트로 정하고, 주당 노동시간 기준을 44시간으로 두었으며, 아동노동을 금지한 법이었습니다.
이 법을 밀어붙인 사람은 노동장관 프랜시스 퍼킨스였습니다. 미국 역사상 첫 여성 각료였던 그는 젊은 시절, 뉴욕의 의류 공장 화재로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법 이름에 들어간 '공정'이라는 단어 뒤에는 그런 배경이 깔려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완전한 법은 아니었습니다. 농업과 가사노동을 비롯한 여러 분야가 적용 대상에서 빠졌고, 그 탓에 당시 미국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던 노동자 상당수가 보호 밖에 남았습니다. 적용 범위는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조금씩 넓어졌습니다.
한국의 출발선, 1988년
한국의 최저임금법은 1986년 12월 31일 제정돼 1988년 1월 1일부터 시행됐습니다. 이른바 '3저 호황'이라 불리던 시기입니다. 경제는 빠르게 커지고 있었지만, 임금 격차가 본격적인 사회 의제로 떠오르던 무렵이었죠.
첫해의 최저임금은 상징에 가까운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이 실제로 받던 임금의 30%에도 못 미쳤다는 평가가 남아 있습니다. 적용 대상도 일정 규모 이상의 제조업으로 한정됐고, 이후 업종과 규모를 넓혀 가며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근로자위원, 사용자위원, 공익위원이 모인 최저임금위원회가 해마다 이듬해 적용될 금액을 심의해 의결합니다. 여름마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그 진통의 무대가 바로 이 위원회입니다.
2026년에 적용되는 최저임금은 시간당 10,320원으로, 전년보다 2.9% 오른 금액이었습니다. 2027년 적용분은 시간당 10,700원, 3.7% 인상으로 의결됐습니다.
최저임금은 일자리를 줄일까
경제학 교과서의 오래된 답은 명확했습니다. 어떤 물건 가격에 정부가 하한선을 그으면, 그 가격에서는 사려는 양이 줄어듭니다. 노동도 마찬가지라면 최저임금을 올릴수록 일자리는 줄어야 하죠. 20세기 내내 이건 거의 상식이었고, 논쟁의 여지도 크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그 상식에 정면으로 부딪힌 연구가 1994년에 나옵니다. 데이비드 카드와 앨런 크루거의 연구입니다. 출발점은 1992년 4월 1일, 뉴저지주가 최저임금을 시간당 4달러 25센트에서 5달러 5센트로 올린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뉴저지와 바로 옆 펜실베이니아의 패스트푸드점 410곳을 인상 전후로 조사했습니다. 최저임금이 오르지 않은 펜실베이니아를 비교 대상으로 삼은 겁니다. 이웃한 두 지역 가운데 한쪽에만 생긴 변화를 마치 실험처럼 들여다본 셈이죠.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뉴저지의 고용은 줄지 않았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수요독점'이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합니다. 한 지역에 일자리를 주는 고용주가 몇 안 되면, 고용주는 임금을 낮게 눌러 둘 힘을 갖게 됩니다. 이런 시장에서는 최저임금이 임금을 정상 수준으로 끌어올리면서 고용까지 늘릴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반론은 곧바로 나왔습니다. 데이비드 노이마크와 윌리엄 워셔는 전화 설문 대신 실제 급여 대장 자료를 구해 같은 사건을 다시 분석했습니다.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뉴저지의 고용이 펜실베이니아보다 줄었다는 것이었죠.
카드와 크루거는 다시 정부 통계를 들고 재반박했습니다. 논쟁은 어느 한쪽의 판정승 없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대치는 지금도 되풀이됩니다. 2017년 시애틀의 최저임금 인상을 두고 워싱턴대 연구진은, 시급은 올랐지만 근로시간이 줄어 저임금 노동자의 총소득이 오히려 줄었다는 결과를 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연구진은 부정적 영향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발표했습니다. 같은 도시, 같은 정책인데 결론이 갈린 겁니다.
그런 와중인 2021년, 데이비드 카드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습니다. 다만 수상 이유는 최저임금 논쟁에서 이겼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현실에서 벌어진 정책 변화를 실험처럼 활용해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방법론을 자리 잡게 했다는 것이었죠. 함께 연구했던 크루거는 2019년에 세상을 떠나 수상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연구자가 공유하는 대체적인 감각은, 인상 폭과 그 지역의 임금 수준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는 쪽입니다. 완만한 인상은 고용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연구가 많습니다. 반면 지역 평균 임금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수준으로 급하게 올리면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연구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이 정리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도 여전히 많습니다.
청구서 한 장이 남긴 질문
130년의 기록을 따라가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최저임금을 두고 맞선 양쪽 모두 진지한 근거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쪽도 데이터를 지어내지 않았고, 어느 쪽도 상대를 무지하다고 몰아세울 만큼 압도적인 증거를 손에 쥐지 못했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연구가 나온 뒤에도 논쟁이 이어지는 분야는 생각보다 드뭅니다.
시장에서 이 주제를 접하는 투자자라면 기억해 둘 대목이 있습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최저임금 결정 소식이 나오고, 그때마다 특정 업종의 운명이 숫자 하나로 결정된다는 식의 단정적인 이야기가 함께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30년 넘게 연구해 온 학자들도 합의하지 못한 질문을, 뉴스 한 줄이 풀어 줄 리는 없습니다.
엘시 패리시가 청구한 216달러는 그리 큰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청구서 한 장이 헌법 해석을 바꾸고, 전국 단위 노동법의 문을 열어젖히고, 결국 오늘 한국의 여름마다 되풀이되는 논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이 글이 정해 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그 질문이 왜 130년 동안 풀리지 않았는지 알고 나면, 해마다 돌아오는 그 소식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읽게 되실 겁니다. 청소부 한 사람의 216달러에서 시작된 질문은, 아직도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