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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 프랑스의 돈을 다시 만든 도박사

1720년 7월 17일 아침, 파리 비비엔 거리. 왕립은행 앞은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저마다 손에 지폐를 한 움큼씩 쥐고 있었죠. 요구는 하나였습니다. 이 종이를 금화로 바꿔 달라는 것.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군중이 한쪽으로 쏠렸습니다. 열다섯 명 안팎이 그 자리에서 깔려 숨졌습니다. 불과 1년 반 전만 해도, 같은 도시 사람들은 바로 그 은행이 찍어 낸 종이를 금화보다 더 반겼습니다. 1년 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글자가 인쇄된 18세기 프랑스 지폐
1720년 프랑스 왕립은행이 발행한 10리브르 지폐. 영국박물관 전시품.Osama Shukir Muhammed Amin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결투와 탈옥, 그리고 도박판에서 다듬은 이론

이 종이를 설계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입니다. 금융사를 통틀어 이만큼 극적인 이력을 가진 인물은 드뭅니다. 1694년 런던에서 결투 끝에 상대를 죽여 사형 선고를 받았고, 형이 벌금으로 감경되는 과정에서 감옥을 빠져나와 유럽 대륙으로 달아났습니다.

그 뒤 20년 가까이, 그는 도박으로 생계를 잇고 재산을 불렸습니다. 그러면서 암스테르담과 베네치아의 은행 제도를 들여다보며 자기만의 이론을 다듬었죠. 도박사의 눈으로 은행을 공부한 셈입니다.

기회는 1715년에 찾아왔습니다. 72년 동안 왕좌를 지킨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것은 베르사유 궁전, 그리고 20억 리브르가 넘는 나랏빚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가 한 해 걷는 세금으로 치면 10년 치를 웃도는 금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새 왕 루이 15세는 겨우 다섯 살이었습니다.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을 맡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에게는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 빈자리에 존 로가 서 있었습니다.

돈이 모자란 게 아니라, 돌지 않는 게 문제다

존 로의 주장은 당시 상식과 정면으로 부딪쳤습니다. 그때까지 한 나라의 부는 곧 그 나라가 가진 금과 은의 양이었습니다. 로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중요한 건 금속이 얼마나 많으냐가 아니라, 거래에 쓸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빠르게 도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금화가 장롱 속에 잠들어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종이돈이 상인들 손을 오가면 거래가 늘고, 거래가 늘면 세금도 늘어난다. 300년 전 사람의 생각이라기엔 놀랄 만큼 지금과 가까운 발상입니다.

1716년 5월, 로는 섭정의 허가를 받아 방크 제네랄이라는 은행을 세웠습니다. 금화나 은화를 맡기면 그만큼의 지폐를 써 주고, 지폐를 가져오면 언제든 금속 화폐로 돌려주는 방식이었습니다. 무거운 금속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으니 상인들은 반겼습니다.

결정적인 한 수는 따로 있었습니다. 정부가 이 지폐로 세금을 받아 주기 시작한 겁니다. 세금을 낼 수 있는 종이는 그 순간부터 누구나 받아 주는 돈이 됩니다.

초기 성과는 뚜렷했습니다. 지폐는 신뢰를 얻어 한때 같은 액면의 금속 화폐보다 비싸게 거래됐고, 거래가 늘자 상업이 되살아났습니다. 로가 나중에 재정 책임자에 오른 뒤 2년 사이 프랑스의 산업 생산이 크게 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오늘날의 중앙은행과 지폐 제도를 300년 앞서 구현한, 꽤 성공적인 실험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 단계였습니다.

지폐와 주식을 한 밧줄로 묶다

1717년, 로는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에 갖고 있던 광대한 땅 루이지애나의 개발 독점권을 받아 서부 회사를 세웠습니다. 흔히 '미시시피 회사'라고 불리는 바로 그 회사입니다.

그는 여기에 결정적인 장치를 하나 달았습니다. 값이 크게 떨어져 있던 정부 채무 증서를 액면 그대로 받아 주고, 회사 주식으로 바꿔 주겠다는 것. 사실상 받기 어려워진 돈을 쥐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죠.

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1718년 방크 제네랄은 정부가 사들여 왕립은행, 곧 방크 루아이얄이 됐습니다. 1719년에는 동인도회사와 아프리카회사 등 프랑스의 해외 무역 독점권을 차례로 흡수해 '인도회사'로 합쳤고, 세금을 걷는 권리와 화폐를 주조하는 권한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1720년 1월 5일에는 재정총감 자리에 올랐고, 2월에는 은행과 회사가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이 사건의 성격은 여기서 결정됩니다. 돈을 찍는 기관, 주식을 파는 회사, 그리고 나라 살림. 이 셋이 한 사람의 손에서 한 덩어리가 된 겁니다.

고리는 이렇게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은행이 찍은 지폐로 회사 주식을 샀고, 회사는 그 지폐로 나랏빚을 떠안았습니다. 주가가 흔들리면 은행은 지폐를 더 찍어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같은 해 영국에서 무너진 남해회사는 주식만 폭락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주식과 돈이 같은 밧줄에 묶여 있었습니다. 한쪽이 떨어지면 다른 쪽도 함께 끌려 내려가는 구조였죠.

지폐가 얼마나 풀렸는지 보여 주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로가 발행 한도로 6천만 리브르를 제시하자, 섭정은 10억 리브르를 찍으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열 배가 아닙니다. 열여섯 배가 넘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누가 브레이크를 밟으려 했느냐입니다. 발행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 쪽은 설계자였고, 제동을 풀어 버린 쪽은 돈이 급한 정부였습니다. 이 순서는 기억해 둘 만합니다.

늪지대를 엘도라도로 팔다

주가를 끌어올리려면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파리 거리에는 루이지애나를 금과 은, 보석이 땅에 깔린 신천지로 그린 소책자가 뿌려졌습니다. 1718년 미시시피강 하류에 세운 새 거점에는 섭정의 이름을 따 '누벨 오를레앙'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오늘날의 뉴올리언스입니다.

지도와 삽화가 함께 돌면서, 파리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실재하지 않는 도시의 풍경이 자리 잡았습니다.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땅이 가장 확실한 투자처처럼 보이기 시작한 거죠.

현실은 딴판이었습니다. 루이지애나는 늪과 열병이 기다리는 미개척지였고,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설립 허가의 조건으로 정착민 6천 명과 노예 3천 명을 식민지로 보내기로 약속해 둔 상태였습니다.

숫자를 맞출 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 1719년 9월부터 파리의 수형자와 부랑자를 배에 태워 보내기 시작한 겁니다. 이 방식은 반발이 거세지면서 1720년 5월에야 금지됐습니다.

거품 이야기에서 흔히 가볍게 지나가는 대목이지만, 가장 큰 대가를 치른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보여 줍니다. 파리에서 주가가 치솟는 동안, 배에 실려 간 사람들 상당수는 도착한 땅에서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주가를 떠받친 화려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채우려 끌려간 사람들. 이 사건에서 가장 먼 거리는 바로 그 둘 사이에 있었습니다.

캥캉포아 거리의 열두 달

주가 기록은 지금 봐도 비현실적입니다. 1719년 1월, 주식은 500리브르에서 출발했습니다. 6월 17일 750리브르, 7월 21일 1,000리브르. 7월 말에는 2,000리브르, 8월 17일에는 3,000리브르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10,000리브르. 열두 달 만에 스무 배입니다. 중간에 숨을 고르는 구간조차 거의 없었다는 점이 이 상승의 특징이었습니다.

거래는 파리 캥캉포아 거리의 노천 시장에서 이뤄졌습니다. 사람이 너무 몰려 밟히는 사고가 잇따르자, 당국은 이 거리에 말과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금지해야 했습니다. 하룻밤 새 신분이 뒤바뀌는 일도 흔해졌습니다.

캥캉포아 거리의 투기 열풍을 그린 풍자 그림
1720년 캥캉포아 거리의 주식 투기를 풍자한 그림.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소장.네덜란드 국립미술관 · CC0 · 위키미디어 공용

그러자 새로운 말이 필요해졌습니다. 백만 단위 재산가를 가리키는 단어가 이 무렵 인쇄물에 등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1719년 10월과 1720년 6월의 파리 간행물에 '백만장자'를 뜻하는 프랑스어 표현이 실린 것이 지금까지 확인된 이른 사례입니다.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쓰는 단어 하나가 이 좁은 거리에서 태어난 셈입니다.

이 거리를 무대로 한 일화도 많습니다. 투기꾼들에게 자기 등을 책상 삼아 계약서에 서명하게 해 주고 큰돈을 벌었다는 꼽추. 주인의 주식을 팔러 나갔다가 그사이 값이 뛰는 바람에 스스로 부자가 돼 일을 그만뒀다는 하인. 지금도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들입니다.

다만 이런 일화는 당대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생겨날 만한 분위기였다는 것까지만 사실로 받아들이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 상승을 떠받친 진짜 주인공은 인쇄기였습니다. 주가가 흔들릴 때마다 왕립은행은 지폐를 더 찍어 주식을 사들였고, 주주들에게 지폐를 빌려줘 주식을 더 사게 했습니다. 시중에 도는 돈은 빠르게 불어났습니다.

1720년 1월, 파리의 물가 상승률은 한 달 사이 20퍼센트를 넘는 수준으로 치솟았습니다. 주가가 오르는 즐거움과 물가가 오르는 고통. 둘은 같은 인쇄기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종이를 금으로 바꾸려던 사람들

균열은 1720년 1월에 시작됐습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 주식을 팔아 지폐를 손에 쥐고, 그 지폐를 들고 은행으로 가 금화로 바꾸기 시작한 겁니다. 종이가 금속으로 바뀌는 순간 로의 계산은 무너집니다. 금고 속 금속보다 찍어 낸 지폐가 훨씬 많았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대응은 강제였습니다. 개인이 일정액 이상의 금과 은을 갖는 것을 금지하고, 결제는 지폐로만 하도록 못 박았습니다. 신뢰를 명령으로 대신하려 한 시도였죠.

1720년 5월 21일, 로는 지폐와 주식의 가치를 단계적으로 낮추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질서 있게 거품을 빼겠다는 뜻이었지만, 사람들이 읽은 메시지는 하나였습니다. 정부 스스로 이 종이의 값이 적힌 숫자만 못하다고 인정했다는 것.

반발이 들끓자 이 결정은 엿새 만에 철회됐고, 로는 5월 29일 재정총감에서 해임됐습니다. 그리고 두 달이 채 안 된 7월 17일, 비비엔 거리의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뒤로는 내리막뿐이었습니다. 10,000리브르까지 올랐던 주가는 9월 2,000리브르, 12월 1,000리브르로 떨어졌고, 1721년 9월에는 처음 출발점이던 500리브르로 돌아갔습니다. 2년 반 동안의 오르내림이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선 겁니다.

지폐는 사정이 더 나빴습니다. 주식은 값이 내려가도 종이로나마 남았지만, 사람들이 지폐로 받아 두었던 재산은 교환 가치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로는 1720년 12월 22일 프랑스를 떠났습니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큰 재산을 굴린다는 평가를 받던 사람이 거의 빈손이었습니다. 재산 대부분이 자기가 만든 회사의 주식과 프랑스 안의 부동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브뤼셀과 베네치아를 떠돌며 다시 도박으로 생계를 이었고, 1729년 3월 21일 베네치아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자기 손으로 한 나라의 돈을 새로 만들었던 사람의 마지막은, 그렇게 조용했습니다.

프랑스는 왜 80년간 지폐를 멀리했을까

이 사건이 남긴 가장 긴 흔적은 손실 금액이 아니었습니다. 거부감이었습니다. 프랑스 사회는 그 뒤 오랫동안 '은행'이라는 말 자체를 꺼렸고, 금융기관들은 이름에 '방크'라는 단어를 넣지 않으려 했습니다.

지폐가 프랑스 경제에 본격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80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1800년 방크 드 프랑스가 세워지기 전까지, 프랑스는 사실상 금속 화폐의 나라로 되돌아가 있었습니다.

주식 시장도 오래 움츠러들었습니다. 1724년 정부는 투기를 관리하겠다며 파리 증권거래소를 공식 설치했는데, 그때 만든 규제 일부는 놀랄 만큼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미래의 가격을 미리 정해 거래하는 선물 방식의 거래는 1885년까지 금지돼 있었습니다. 사고 한 번이 160년짜리 금지 조항을 남긴 겁니다.

그사이 해협 건너 영국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같은 1720년 남해회사로 똑같이 홍역을 치렀지만, 영란은행은 그대로 남았고 국채와 주식 시장도 계속 돌아갔습니다.

이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졌습니다. 18세기 후반, 두 나라가 자금을 끌어오는 능력의 차이는 전쟁의 승패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랑스의 재정 압박은 끝내 풀리지 않고 루이 16세 시대의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많은 연구자는 이 긴 사슬이 1789년 혁명으로 가는 조건의 일부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존 로의 이론은 틀렸던 걸까요. 그렇지 않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금속의 양이 아니라 신용이 경제를 움직인다는 생각, 중앙은행이 자산을 사들여 돈을 공급한다는 발상은 오늘날 거의 모든 나라가 쓰고 있는 방식입니다.

차이는 순서와 브레이크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중앙은행은 정부와 분리돼 있고, 주가를 떠받치려고 돈을 찍는 일은 금지돼 있습니다. 로의 실험은 그 두 장치가 왜 필요한지를, 가장 비싼 방법으로 증명했습니다.

300년 전 파리가 지금 묻는 것

이 이야기의 핵심은 주가가 스무 배 올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주가를 떠받친 돈과 사람들이 먹고사는 데 쓰던 돈이 같은 돈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투자한 자산이 무너질 때 생활까지 함께 무너지느냐는 바로 이 연결 고리에서 갈립니다.

이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내 자산 가격이 반으로 줄었을 때, 그것이 손실로 끝나는가. 아니면 생활비와 빚 갚을 돈까지 흔드는가.

신뢰는 명령으로 대신할 수 없다는 점도 남습니다. 금화를 갖지 말고 지폐로만 결제하라는 조치는 사태를 가라앉히기는커녕, 사람들의 의심이 옳았다는 확인 도장이 됐습니다. 가격을 억지로 떠받치는 조치가 나올 때 시장이 그것을 안심의 근거로 읽을지 위험의 증거로 읽을지는, 300년 전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 더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존 로는 사기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이론을 진심으로 믿었고, 자기 재산도 끝까지 그 안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를 무너뜨린 것은 거짓이 아니라 멈출 수 없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주가가 흔들릴 때마다 지폐를 더 찍는 선택을 되풀이하는 동안, 돌아갈 지점은 점점 멀어졌습니다.

확신에 찬 사람이 브레이크 없이 판을 키우면 어떤 결말이 오는가. 비비엔 거리에 쓰러진 사람들과 빈손으로 떠난 존 로가, 300년째 같은 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