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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창구가 닫힌 일요일 밤 9시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밤, 미국 가정의 TV 화면에 예고에 없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었습니다. 그가 몇 분 동안 읽어 내려간 연설은 27년 동안 세계 무역을 떠받쳐 온 약속 하나를 끝내 버렸습니다. 달러를 내밀면 언제든 금을 내준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야기는 나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71년 8월 11일 무렵, 영국 측이 미국 재무부에 요청 하나를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갖고 있는 달러 가운데 30억 달러어치를 금으로 바꿔 달라는 것이었다고 전해지죠. 규칙대로라면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었습니다. 미국은 금 1온스를 35달러에 언제든 바꿔 주겠다고 약속했고, 세계 무역은 그 약속 위에서 돌아가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영국의 요청을 들어주면 다음 나라가 줄을 설 겁니다. 그리고 미국 금고에는 줄 선 모든 나라에 내줄 만큼의 금이 없었습니다.

사실 숫자는 오래전에 뒤집혀 있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미국의 금 보유량은 책임져야 할 대외 채무의 55퍼센트 수준이었습니다. 1970년에는 그 비율이 22퍼센트로 주저앉았습니다. 1971년 상반기에만 220억 달러 규모의 자금이 미국을 빠져나갔습니다.

같은 해 미국은 1888년 이후 처음으로 알려진 상품 무역 적자를 냈습니다. 적자 금액은 22억 6천만 달러. 지금 기준으로 보면 큰돈은 아닙니다. 하지만 100년 가까이 이어지던 흑자 행진이 끊겼다는 신호의 무게는 금액과 견줄 수 없었습니다.

1944년 브레튼우즈에서 설계된 세계 통화 체제를 2층집에 빗대 볼까요. 1층에는 자기 통화를 달러에 고정한 각국이 있고, 2층에는 그 달러를 금과 이어 준 미국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1971년 8월, 그 2층이 무너집니다. 놀라운 건 결정 방식입니다. 몇 년에 걸친 공개 토론이 아니라, 주말 사흘 동안 산장에 모인 열다섯 명 남짓이 바깥세상과 연락을 끊은 채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금이 새어 나가던 10년

압박은 하루아침에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이 약속의 빈틈을 대놓고 문제 삼았습니다. 샤를 드골 대통령은 1965년 기자회견에서, 국제 통화 체제의 기준은 달러가 아니라 금이어야 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드골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한 나라가 자기 돈을 찍어서 다른 나라의 자산을 사들일 수 있는 구조는 공정하지 않다는 것. 말로 끝나지도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갖고 있던 달러를 실제로 금으로 바꿔 가며 그 논리를 행동으로 보여 줬습니다.

미국과 유럽 주요국은 금값이 공식 가격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공동 방어선을 쳤습니다. 1961년 11월 1일 여덟 개 정부가 참여해 만든 '런던 금 풀'입니다. 시장에서 금값이 오르려 하면 각국이 가진 금을 함께 내다 팔아 값을 눌러 두는 방식이었죠.

처음엔 통했습니다. 하지만 금을 내다 파는 쪽은 결국 금을 잃게 마련입니다. 1968년 3월 중순, 런던 시장에서 달러를 금으로 바꾸려는 주문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금 풀은 해체됐습니다. 그 뒤로 금값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중앙은행끼리 주고받는 공식 가격과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이 따로 움직이는 이중 구조가 된 겁니다.

금이 새어 나가는 동안 미국은 오히려 돈을 더 쓰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전 전비에 대규모 복지 확대가 겹치면서 정부 지출이 불어났습니다. 여기서 생긴 인플레이션은 미국 물건을 상대적으로 비싸게 만들었고, 수입은 늘었습니다. 한쪽으로는 금을 지켜야 하는데, 다른 쪽으로는 돈을 계속 풀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1959년 로버트 트리핀이 지적했던 구조적 모순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모순이 재정과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의 청구서가 되어 돌아온 셈입니다.

1971년 여름, 시장은 더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달러를 금이나 다른 통화로 바꾸려는 흐름이 거세졌고, 유럽 중앙은행들은 밀려드는 달러를 받아 내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영국의 30억 달러 요청은 이 흐름의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더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게 만든 마지막 숫자였습니다.

캠프데이비드, 바깥과 끊긴 48시간

8월 12일 오후, 닉슨은 재무장관 존 코널리를 만나 새 경제정책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이튿날 그는 핵심 인물들을 대통령 별장 캠프데이비드로 불러들였습니다. 첫 회의는 8월 13일 오후 3시 15분에 시작해 저녁 7시까지 이어졌습니다. 논의는 그 뒤로도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8월 15일 오전 11시 30분까지 계속됐습니다.

수영장 너머로 보이는 캠프데이비드 산장
닉슨 행정부 백악관 사진실이 찍은 캠프데이비드 산장과 앞쪽의 수영장.닉슨 행정부 백악관 사진실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산장에 모인 얼굴은 이랬습니다. 코널리,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 아서 번스, 재무부의 폴 볼커, 예산 책임자 조지 슐츠, 경제자문위원회의 폴 매크래컨과 허버트 스타인, 상무 쪽의 피터 피터슨, 비서실의 홀더먼과 얼릭먼. 그리고 연설문을 쓸 윌리엄 새파이어 등이었습니다.

더 눈길을 끄는 건 그 자리에 없던 사람들입니다. 국무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회의가 시작될 때까지 그런 모임이 열린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의 환율이 걸린 결정에서 외교 라인이 통째로 빠진 겁니다. 참석자들은 바깥 연락을 끊은 채 주말을 보냈습니다. 정보가 새어 나가면 시장이 먼저 움직여 손쓸 수 없게 된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산장 안에서도 의견은 갈렸습니다. 중앙은행 수장 아서 번스는 금 창구를 닫지 말자고 버텼습니다. 27년을 지켜 온 약속을 한쪽이 일방적으로 깨면, 달러에 대한 신뢰 자체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다칠 수 있다는 걱정이었죠. 코널리의 논리는 정반대였습니다. 지금 닫지 않으면 금고가 비어 가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

저울은 코널리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번스는 끝까지 자기 입장을 말했지만 결정을 뒤집지는 못했습니다.

주말이 끝나 갈 무렵 세 가지가 정리됐습니다. 달러를 금으로 바꿔 주는 창구를 닫는다.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임금과 물가를 법으로 묶는다. 그리고 수입품에 관세를 더 물려 무역 적자를 줄인다.

하나만 나와도 큰 뉴스가 될 조치 세 개를 한 번에 묶은 건 계산된 선택이었습니다. 가장 아픈 소식만 덩그러니 내보내는 대신, 국민 모두가 나눠 질 부담과 국내 경기를 살리는 조치를 함께 발표해 전체를 하나의 꾸러미처럼 보이게 만든 것입니다.

일요일 밤 9시, 보난자 대신 대통령

그리고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밤 9시. 닉슨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예고 없이 전국 방송에 나섰습니다. 일요일 밤 9시는 미국 가정이 인기 서부극 '보난자'를 보려고 TV 앞에 모이는 시간이었습니다. 정규 편성이 끊기고 대통령이 나타났으니, 많은 시청자는 무슨 일이 터졌나 싶었을 겁니다. 연설 제목은 '평화의 과제'. 내용은 통화 질서의 대전환이었습니다.

핵심 문장은 짧았습니다. 달러를 금이나 다른 준비자산으로 바꿔 주는 일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 일시적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들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영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발표도 굵직했습니다. 전국의 모든 임금과 물가를 90일간 동결하고, 미국으로 들어오는 수입품에 10퍼센트의 추가 세금을 매긴다는 것이었습니다. 동결을 집행할 기구로 생활비위원회를 만들고, 기업이 설비에 투자하면 10퍼센트의 세액 공제를 1년간 주겠다는 당근도 함께 내놨습니다.

연설의 수사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닉슨은 국제 환투기 세력이 위기를 먹고 살 뿐 아니라 위기를 만드는 데 거들기까지 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이 지키지 못하게 된 약속을 바깥의 투기 세력 탓으로 돌리는 구도를 짠 셈이죠.

동시에 그는 한 나라 통화의 힘은 그 나라 경제의 힘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금이라는 담보가 없어도 달러는 괜찮다는 논리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말은 맞았습니다. 다만 그날 밤에는 누구도 그걸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박수가 먼저, 혼란은 그다음

미국 안의 반응은 뜻밖에도 환호였습니다. 다음 날인 8월 16일,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33포인트 올랐습니다. 당시로서는 하루 상승 폭으로 역대 최대였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대통령이 보여 준 과감함에 주저 없이 박수를 보낸다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무역 적자와 물가에 지쳐 있던 미국 대중에게 이 발표는 약속을 깬 사건으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누군가 뭔가를 한 사건이었죠.

국경 밖 사정은 딴판이었습니다. 환율의 기준선이 사라지자 각국 외환시장은 가격을 매길 근거를 잃었습니다. 수출 대금을 달러로 받기로 계약해 둔 기업들은 그 돈이 얼마가 될지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수입품에 붙은 10퍼센트 추가 관세는 일본과 서독처럼 미국 시장에 기대던 나라에 직격탄이었습니다. 약속을 깬 건 미국인데, 뒷수습은 나머지 세계의 몫이 된 겁니다.

이 비대칭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말이 그해 말 로마에서 열린 선진 10개국 재무장관 회의에서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당황한 유럽 측 상대들에게 코널리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죠. 달러는 우리 통화지만, 그건 당신들의 문제다.

이 발언이 정확히 언제, 어떤 자리에서 나왔는지는 기록이 엇갈립니다. 코널리 본인의 말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출처를 두고 다툼이 이어지는 와중에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인용됐다는 사실 자체가, 이 말이 당시의 구도를 얼마나 정확히 찍어 냈는지 보여 줍니다.

봉합 시도도 있었습니다. 1971년 12월 18일, 각국은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에 모여 환율표를 다시 그렸습니다. 금값을 1온스 35달러에서 38달러로 올려 달러 가치를 약 7.9퍼센트 낮추고, 각국 통화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을 위아래 1퍼센트에서 2.25퍼센트로 넓히는 절충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금태환, 즉 달러를 금으로 바꿔 주는 제도는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고정환율의 겉모양만 남기고 토대는 비워 둔 합의였습니다.

임금과 물가를 묶어 둔 2년 반

세 가지 조치 가운데 미국인의 일상에 가장 직접 닿은 건 금태환 정지가 아니었습니다. 임금과 물가 동결이었죠. 처음 90일의 성적은 괜찮았습니다. 동결 기간 동안 물가 상승률은 연 4퍼센트 수준으로 내려앉았고, 정부는 정책이 통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의회 연단에서 연설하는 닉슨 대통령
1971년 9월 9일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90일 임금 동결 정책을 설명하는 닉슨 대통령.UPI 통신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습니다. 동결이 풀리고 가이드라인 방식으로 바뀐 뒤 약 1년 반 동안, 물가 상승률은 5퍼센트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가격 상한을 법으로 정하면 가격표는 멈춥니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까지 멈추지는 않습니다. 팔아도 남는 게 없어진 생산자들은 물량을 줄이거나 아예 시장을 떠났고, 결과는 품귀였습니다. 값은 묶였는데 물건이 없는 상황을 겪으며 소비자들도 정책에 등을 돌렸습니다. 정부는 1973년 6월 다시 한 번 동결 카드를 꺼냈지만, 같은 문제가 되풀이됐습니다.

통제 장치는 1974년 4월에 폐지됐습니다. 그리고 닉슨이 사임한 1974년 8월을 지나 그해 가을,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12퍼센트를 넘어섰습니다. 가격을 눌러 둔 2년 반 동안 물가를 밀어 올리던 힘은 사라진 게 아니라 쌓여 있었던 겁니다. 뚜껑을 열자 그만큼 더 세게 튀어 올랐습니다.

가격은 병이 아니라 증상이었다는 사실. 미국은 그것을 비싼 수업료를 내고 확인한 셈입니다.

닻을 잃은 돈, 그래도 한가운데 남은 달러

스미스소니언 합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73년 2월 12일 미국은 달러 가치를 10퍼센트 더 낮춘다고 발표했습니다. 곧이어 일본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환율을 시장에 맡기는 쪽으로 돌아섰고, 1973년 3월에는 주요 통화가 사실상 모두 변동환율제로 넘어갔습니다.

환율이 정부가 정해 주는 숫자에서, 매일 시장이 매기는 가격으로 바뀐 겁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원달러 환율을 확인하는 세상은 이때 시작됐습니다.

이제 세계의 주요 통화는 금이나 다른 실물자산에 묶이지 않게 됐습니다. 돈의 가치를 받치는 건 그 돈을 찍은 정부와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뿐이었습니다. 이런 돈을 불환지폐, 곧 금 같은 실물로 바꿔 주지 않는 지폐라고 부릅니다. 바꿔 말하면 중앙은행이 찍을 수 있는 돈의 물리적 한도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1970년대의 극심한 인플레이션, 그리고 그 뒤 반세기 동안 되풀이된 통화정책 논쟁의 뿌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역설은 그다음입니다. 담보를 잃은 달러가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았다는 것. 1974년 이후 미국과 산유국 사이의 협력이 자리를 잡으면서 원유를 달러로 사고파는 관행이 굳어졌습니다. 세계는 무역을 하려면 여전히 달러가 필요했고, 각국 중앙은행은 금 대신 미국 국채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금이라는 닻이 빠진 자리를 미국 경제의 덩치와 미국 국채 시장의 깊이가 대신 메운 셈입니다.

하룻밤에 바뀐 규칙이 남긴 것

닉슨 쇼크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속도입니다. 27년 동안 세계 무역의 기준이던 약속이 주말 사흘의 비공개 회의와 몇 분짜리 TV 연설로 사라졌습니다. 사전 협의도, 유예 기간도, 외교 통보도 없었습니다. 시장이 믿고 있는 규칙이 꼭 시장의 속도로 바뀌는 건 아닙니다. 어떤 규칙은 하룻밤에 바뀌고,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시점은 모두에게 같지 않습니다.

공식 설명과 실제 사이의 거리도 남습니다. 발표문에는 일시적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있었지만 금 창구는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90일만 하겠다던 가격 통제는 2년 반을 끌었고, 효과는 오히려 뒤집혔습니다. 정책 발표를 읽을 때는 그것이 무엇을 약속하는지보다, 그 약속을 지킬 조건이 실제로 갖춰져 있는지를 보는 편이 훨씬 쓸모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무거운 사실 하나. 1971년 8월 이후 우리가 쓰는 돈의 가치를 보증하는 건 금이 아니라 제도와 신뢰뿐입니다. 신뢰는 무너지기 전까지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무너지는 순간에는 되돌릴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통화정책이나 환율 뉴스를 볼 때 숫자의 방향만 좇기보다, 그 숫자를 받치는 신뢰가 어떤 상태인지 함께 살피는 습관이 긴 투자에서는 훨씬 큰 차이를 만듭니다.

금 창구는 일요일 밤 9시에 닫혔고, 다시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날 밤이 만든 세계에서 돈을 벌고, 쓰고, 모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