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목록으로

맨해튼을 넘기고 육두구 섬을 챙겼다는 이야기

17세기 초,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 이곳에서 육두구 10파운드 무게를 사는 데는 영국 돈 1페니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물량이 배를 타고 런던에 닿으면 2파운드가 넘는 값에 팔렸습니다. 앞의 파운드는 무게 단위, 뒤의 파운드는 화폐 단위입니다. 비율로 따지면 6만 퍼센트가 넘는 차이였습니다. 같은 물건이 바다를 건너는 동안 값이 이토록 불어난 상품은 흔치 않았습니다.

지금 마트 향신료 코너에 가면 육두구 가루 한 병을 몇천 원에 살 수 있습니다. 케이크나 크림 스튜에 살짝 넣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향신료죠. 하지만 그 시절 유럽 국가들은 이 씨앗 하나 때문에 함대를 보내고, 섬을 뒤엎고, 서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덜란드가 맨해튼을 영국에 넘기고, 대신 육두구가 나는 손바닥만 한 섬 하나를 챙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뉴욕 맨해튼과 지도에서 찾기도 힘든 섬을 바꿨다니, 처음 듣는 사람은 대개 웃습니다.

그런데 실제 조약 문서를 펼쳐 보면 이야기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널리 퍼진 이야기와 문서에 적힌 내용 사이에는 꽤 넓은 틈이 있습니다. 그 틈이 오늘 이야기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역병을 막아 준다고 믿었던 씨앗

육두구는 살구를 닮은 열매 안에 든 씨앗입니다. 씨앗을 감싼 붉은 그물 모양의 껍질은 따로 떼어 메이스라는 다른 향신료로 팔렸습니다. 문제는 이 나무가 자라는 곳이 지구에서 사실상 한 군데뿐이었다는 점입니다. 인도네시아 동쪽, 지금의 말루쿠 주에 속한 반다 제도라는 아주 좁은 화산섬 무리였습니다.

반으로 갈라진 열매 속 붉은 그물에 싸인 씨앗
갈라진 육두구 열매 속에 붉은 메이스가 씨앗을 감싸고 있는 모습.Schlawensko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값이 그렇게 벌어진 첫 번째 이유는 수요였습니다.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럽은 흑사병과 되풀이되는 역병에 시달렸습니다. 당시 의학은 병이 나쁜 공기를 타고 옮는다고 봤고, 향이 강한 물질을 몸에 지니면 그 공기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육두구는 그 믿음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육두구를 작은 주머니에 넣어 목에 걸고 다녔고, 의사들도 그렇게 하라고 권했습니다.

물론 의학적으로 역병을 막아 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중요한 건 효과가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1500년대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산지 가격의 수십 배에 이르는 값이 매겨졌고, 역병이 물러간 뒤에도 값은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식탁에서 육두구를 갈아 올리는 일 자체가 재산을 과시하는 방법이 됐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공급이었습니다. 수요가 몇 배로 늘어도 나무가 자라는 섬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려는 쪽은 유럽 전체인데 파는 쪽은 섬 몇 개. 이럴 때 값은 원가와 아무 상관 없는 수준까지 벌어질 수 있습니다.

독점은 이렇게 지켜졌다

이 구조를 손에 넣은 것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입니다. 1602년에 세워진 이 회사는 무역회사였지만 군대를 두고, 조약을 맺고, 요새를 쌓을 권한까지 가진 사실상의 국가였습니다. 회사 자체의 이야기는 다른 편에서 따로 다뤘으니, 여기서는 이 회사가 육두구에 한 일만 보겠습니다.

1621년, 총독 얀 피터르스존 쿤이 반다 제도 정복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정복 전 반다 제도 주민은 약 1만 5천 명으로 추정됩니다. 정복이 끝난 뒤 남은 사람은 1천 명 안팎이었습니다. 한 연구자는 주민의 약 90퍼센트가 죽거나 노예가 되거나 쫓겨났다고 봅니다.

기록에 남은 수치만 봐도 끔찍합니다. 2,800명이 살해됐고 1,700명이 노예가 됐습니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은 사람은 그보다 더 많았습니다. 향신료 한 가지를 독차지하려고, 섬에 살던 사람들을 거의 통째로 지워 버린 셈입니다.

주민을 없앤 자리에는 네덜란드인 농장주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인도와 중국, 동인도 곳곳에서 끌려온 노예의 노동으로 육두구를 길렀습니다. 1681년 기록을 보면 원래 반다 주민의 후손은 100명 수준까지 줄어 있었고, 농장을 돌리려면 해마다 200명씩 노예를 새로 들여와야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가 나는 섬에서, 정작 그 향신료를 길러 내는 사람은 아무것도 갖지 못했습니다.

독점을 지키는 기술적인 장치들도 있었습니다. 밖으로 내보내는 씨앗은 석회에 담가 싹이 트지 않게 했습니다. 풍작이 든 해에는 남는 물량을 창고에 쌓아 두는 대신 불태워 값을 지켰습니다. 열매를 먹은 비둘기가 씨앗을 다른 섬에 떨어뜨리면, 사람을 보내 그 묘목을 찾아내 없앴습니다.

룬 섬에서 버틴 1,540일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룬 섬은 반다 제도의 가장 서쪽에 있습니다. 길이 3킬로미터, 폭 1킬로미터. 1616년 12월 25일, 영국 상인 나다니엘 코토프가 이 섬에 상륙했고 주민들은 영국 왕을 섬의 주권자로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네덜란드 독점의 한복판에 영국 깃발이 하나 꽂힌 겁니다.

바다 위에 낮게 누운 작은 섬 두 개
반다 제도 서쪽의 룬 섬(왼쪽)과 나일라카 섬.Hans Peter Grumpe · CC BY-SA 3.0 · 위키미디어 공용

네덜란드가 이걸 그냥 둘 리 없었습니다. 코토프는 유럽인 39명과 현지 동맹군으로 섬을 요새로 만들고 네덜란드의 포위를 버텼습니다. 그렇게 버틴 날이 1,540일, 4년이 넘습니다. 1620년 네덜란드의 공격 중에 코토프가 숨졌고, 남은 영국인들은 섬을 떠났습니다.

섬을 차지한 네덜란드가 한 일은 앞서 본 방식 그대로였습니다. 성인 남성은 죽이거나 노예로 삼고, 여자와 아이는 다른 곳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섬에 있던 육두구 나무를 전부 베어 냈습니다. 독점을 지키려고 독점 상품 자체를 없애는, 이상하지만 계산으로는 앞뒤가 맞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종이 위의 권리는 남았습니다. 165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에서 네덜란드는 룬 섬을 영국에 돌려주기로 약속했지만, 실제로 넘겨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1660년대의 룬 섬은 실제로는 네덜란드가 쥐고 있고, 문서상으로는 영국이 권리를 주장하는 어정쩡한 상태였습니다. 주인은 하나인데 권리를 주장하는 쪽은 둘. 이 어정쩡함을 기억해 두시면 다음 이야기가 훨씬 또렷해집니다.

맞교환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조약 제3조

먼저 맨해튼 쪽을 보겠습니다. 1664년 5월 25일, 리처드 니콜스가 군함 네 척과 병사 300명 남짓을 이끌고 영국 포츠머스를 떠났습니다. 8월 27일 롱아일랜드에 도착했고, 9월 4일 요새 앞까지 배를 밀어붙였습니다. 9월 6일 항복 문서가 서명됐고 9월 8일 네덜란드군이 물러났습니다.

이때 뉴암스테르담은 뉴욕이 됩니다. 중요한 건 이 일이 조약보다 3년이나 앞섰다는 사실입니다. 맨해튼은 협상 테이블에서 건네진 게 아니라, 이미 영국 손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성벽과 집들이 그려진 옛 도시 지도
1660년 뉴네덜란드의 뉴암스테르담(맨해튼)을 그린 지도 「카스텔로 플랜」.요하네스 빙분스(지도), 자크 코르텔리우(측량)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이 사건은 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번졌습니다. 전쟁 막바지인 1667년 6월, 네덜란드 함대가 템스강 지류인 메드웨이강까지 들어와 영국 주력 군함을 불태우고 기함을 끌고 갔습니다. 그러니 협상 테이블에 앉을 때 형세가 좋았던 쪽은 네덜란드였습니다. 궁지에 몰려 맨해튼을 억지로 내준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1667년 7월 31일, 브레다에서 조약이 서명됐습니다. 핵심은 제3조입니다. 라틴어로 '우티 포시데티스'라는 원칙을 적용했는데, 풀어 쓰면 그해 5월 20일을 기준 날짜로 정하고 그날 각자 실제로 점령하고 있던 곳을 그대로 갖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맞교환이 아니라 현상 승인입니다.

이 기준을 대입하면 결과는 저절로 나옵니다. 뉴네덜란드는 3년째 영국이 점령하고 있었으니 영국 몫. 룬 섬은 1621년부터 사실상 네덜란드가 쥐고 있었으니 네덜란드 몫. 여기에 네덜란드는 그해 2월 아브라함 크레인센을 보내 영국에게서 빼앗은 수리남과, 그보다 앞서 차지한 서아프리카의 코르만틴 요새도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네덜란드가 맨해튼을 주고 룬을 받은 게 아닙니다. 룬은 이미 네덜란드 것이었고, 내줄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이 협상에서 네덜란드가 실제로 값을 따진 새 영토는 룬보다 설탕이 나는 수리남이었습니다. 종이 위에 남아 있던 영국의 룬 섬 권리 주장을 이 조약이 깨끗이 정리해 준 것, 그게 네덜란드가 얻은 실익이었습니다. 조약문 어디에도 섬 하나와 도시 하나를 바꾼다는 문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맞교환 이야기는 왜 그렇게 널리 퍼졌을까요. 결과만 떼어 놓고 보면 영국은 맨해튼을, 네덜란드는 육두구 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대비가 극적이고, 뉴욕이 어떤 도시가 됐는지 아는 후대 사람에게는 이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없죠. 하지만 1667년에 두 곳을 저울질하던 사람들 눈에, 한쪽은 모피를 모으는 변두리 항구였고 다른 한쪽은 세계 유일의 육두구 산지였습니다. 그 계산으로는 이상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화분 몇 개가 무너뜨린 독점

독점을 깬 건 함대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의 피에르 푸아브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성이 프랑스어로 '후추'라는 뜻이라, 공교롭게도 향신료와 얽힌 이름입니다. 그는 1750년 네덜란드 세력권의 여러 섬을 돌며 육두구 묘목을 빼냈는데, 19그루 가운데 다섯 그루만 살아남았습니다. 그 다섯 그루가 1753년 4월 인도 퐁디셰리를 거쳐 그해 12월 모리셔스에 닿았습니다.

1769년 프랑스 정부는 몰루카 제도의 인적 드문 곳을 노린 비밀 원정을 다시 허가했고, 1770년 모리셔스에 묘목이 들어왔습니다. 이후 레위니옹과 세이셸에도 심었습니다. 영국은 1796년 페낭에 육두구 씨앗을 옮겨 심었고, 이곳 농장은 잘 자랐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중인 1810년에는 영국이 반다 제도를 직접 점령해, 1817년 무렵 묘목을 자기 식민지 여러 곳으로 실어 냈습니다.

1843년에는 반다 제도에서 가져온 씨앗이 카리브해의 그레나다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본격적인 생산은 1860년 이후에야 시작됐지만, 결국 그레나다는 세계적인 육두구 산지가 됐습니다. 세상에 한 군데뿐이라던 산지가 인도양과 말레이반도, 카리브해로 흩어진 겁니다. 씨앗은 특허와 다릅니다. 한 번 심는 데 성공하면, 그다음부터는 스스로 늘어납니다.

산지가 여러 곳이 되자 값은 내려갔습니다. 세계 가격이 떨어지면서 독점 체제는 더 이상 수지가 맞지 않게 됐고, 1864년 네덜란드 정부는 육두구와 정향 독점을 공식적으로 없앴습니다. 250년 안팎에 걸쳐 학살과 방화와 조약으로 지켜 온 체제. 그것을 무너뜨린 건 배 밑창에서 죽지 않고 버틴 화분 몇 개였습니다.

씨앗 한 알이 남긴 것

먼저 눈에 걸리는 건 1667년의 판단입니다. 지금 보면 우스운 선택이지만, 당시 정보로는 앞뒤가 맞는 계산이었습니다. 우스워 보이는 건 우리가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주 합리적이라 믿으며 내리는 판단들도, 몇십 년 뒤 결과를 아는 누군가에게는 똑같이 우스워 보일지 모릅니다.

값에 관한 질문도 남습니다. 어떤 물건의 값이 만드는 비용과 아무 상관 없는 수준까지 벌어져 있다면, 그 차이를 지켜 주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건 '값이 얼마나 더 오를까'가 아닙니다. 그 차이를 지켜 주는 게 정확히 무엇이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느냐입니다. 육두구의 경우 그것은 '이 씨앗은 이 섬에서만 자란다'는 전제 하나였습니다.

무너지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네덜란드는 정면 대결에서 진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독점은 전투가 아니라, 전제가 슬며시 틀어지면서 깨졌습니다. 가장 단단한 곳을 공격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지키지 않던 화분 몇 개를 통해서였죠. 오래 버틴 구조가 무너질 때는 대개 이런 식입니다.

이야기의 끝은 우리 부엌입니다. 육두구 값이 평범해진 건 시장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작동한 결과입니다. 다만 그 평범한 값에 이르기까지 반다 제도 주민 대부분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할 만합니다. 지금 룬 섬에는 1,500명 남짓이 살고, 육두구 나무는 여전히 그곳에서 자랍니다.

한때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리게 만든 씨앗이, 지금은 그냥 향신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