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합문서 한 장이 뉴욕증권거래소가 된 날
2026-09-25 · 8분 읽기
1792년 5월 17일, 뉴욕 월스트리트. 중개인 스물네 명이 종이 한 장에 차례로 이름을 적었습니다. 월스트리트 68번지에 서 있던 커다란 플라타너스, 당시 사람들이 버튼우드라고 부르던 나무의 이름을 따서 우리는 이 문서를 버튼우드 합의문이라고 부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주식시장, 뉴욕증권거래소의 출발점으로 소개되는 바로 그 종이입니다.
그런데 막상 펼쳐 보면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전체 길이가 두 문장뿐입니다. 그 두 문장을 오늘의 말로 옮기면 대략 이렇습니다. 수수료는 이 밑으로 절대 받지 말자. 그리고 거래는 우리끼리 먼저 하자.

세계 금융의 심장이 이런 약속에서 시작됐다니,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이 두 문장이 왜 필요했는지 알려면 두 달 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792년 3월, 뉴욕에서 거래되던 미국 국채 값이 몇 주 사이에 30% 가까이 빠졌습니다. 나라가 발행한 가장 안전한 종이가 한 달도 안 돼 3분의 1 가까이 녹아내린 셈입니다. 전쟁이 난 것도, 흉년이 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몇 사람이 남의 돈을 잔뜩 빌려 국채를 싹쓸이해 값을 띄우려다 실패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놀란 뉴욕 당국은 아예 길거리에서 증권을 경매로 파는 일을 금지해 버렸습니다.
나무 아래 모이기 전, 뉴욕에서 벌어진 일
이야기의 배경에는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있습니다. 독립전쟁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빚을 연방정부가 한데 모아 새 국채로 갈아 끼우고,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 격인 미합중국은행을 세운 것이 1790년대 초입니다. 여기서 공채란 정부가 돈을 빌리면서 써 준 차용증을 말합니다.
믿을 만한 차용증과 은행 주식이 갑자기 시장에 쏟아지자, 뉴욕 상인들은 이것을 사고팔며 차익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번듯한 거래소 건물 같은 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페더럴홀 근처 길바닥과 커피하우스에서 값을 외쳤습니다.

그 열기 한복판에 윌리엄 듀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재무부 차관보까지 지낸 사람으로, 안에서 본 정보와 바깥의 인맥을 함께 쥐고 있었죠. 그는 알렉산더 매콤 같은 동업자와 손잡고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빌려 국채와 은행 주식을 사 모았습니다. 값은 오를 수밖에 없다고 믿었고, 실제로 한동안은 올랐습니다.
빌린 돈으로 자기 돈보다 큰 판을 굴리는 방식, 지금은 이를 레버리지라고 부릅니다. 오를 때는 수익이 크게 불어납니다. 대신 내릴 때는 원금보다 빚이 먼저 무너집니다.
1792년 3월 9일, 듀어가 지급을 멈추자 연쇄 반응이 시작됐습니다. 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담보로 잡은 증권을 팔았고, 그 매물이 값을 더 끌어내렸고, 값이 떨어지니 또 담보를 팔아야 했습니다. 내리막에 브레이크가 없었습니다.
해밀턴은 시장에 직접 뛰어들었습니다. 정부 자금으로 국채를 사들였고, 뉴욕은행이 대출을 끊지 않도록 설득했습니다. 필요하면 담보로 잡힌 증권을 정부가 상당한 규모까지 사 주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오늘날 중앙은행이 위기 때 하는 일과 놀랄 만큼 닮은 조치였고, 미국 역사상 첫 금융위기 진화 작업으로 기록됩니다.
공황은 봄이 지나며 잦아들었지만 뒷맛은 고약했습니다. 듀어는 감옥에서 생을 마쳤고, 길거리 증권 경매는 금지됐습니다. 중개인들 앞에는 두 가지 숙제가 한꺼번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공개된 장소에서는 장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결제를 제대로 해 줄 사람인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게 됐습니다.
두 문장에 숨은 진짜 뜻
합의문의 내용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서명한 우리는 공채를 중개할 때 정화 가치의 4분의 1퍼센트보다 낮은 수수료로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사거나 팔지 않겠다. 그리고 거래할 때는 서로에게 우선권을 주겠다.
정화는 금이나 은 같은 실물 화폐를 말합니다. 정리하면 수수료 하한선을 0.25%로 못 박고, 주문은 서명자들끼리 먼저 주고받기로 한 것입니다.
경제학 용어로 이건 카르텔입니다. 같은 업종의 사업자들이 값을 내리지 않기로 서로 약속하는 것이죠. 오늘 한국에서 증권사들이 모여 수수료를 이 밑으로는 받지 말자고 합의했다면, 곧장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대상이 됩니다. 두 번째 조항은 한술 더 뜹니다. 회원이 아닌 중개인은 좋은 주문 흐름에서 구조적으로 밀려나게 되니, 가격 담합에 배타적 거래까지 얹은 셈입니다.
손해를 보는 쪽은 분명합니다. 수수료를 내는 투자자입니다. 경쟁이 있었다면 더 내려갔을 비용이, 약속 하나로 바닥에 고정돼 버렸으니까요. 굳이 미화할 이유는 없습니다. 뉴욕증권거래소의 출발점은 투자자 보호 선언문이 아니라, 동업자들의 밥그릇을 지키는 약정서였습니다.
다만 왜 하필 그런 문서가 필요했는지는 따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증권 거래에는 지금 같은 청산 절차가 없었습니다. 청산이란 거래가 성립된 뒤 돈과 증권이 실제로 오가도록 중간에서 보장해 주는 절차입니다. 이게 없으면 값을 합의해도, 상대가 다음 날 나타나지 않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공황을 막 겪은 사람들에게 아무하고나 거래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두 얼굴을 갖고 있었습니다. 담합이면서, 동시에 결제 위험을 줄이는 안전장치였던 거죠.
정말 나무 아래에서 서명했을까
버튼우드 나무 아래 스물네 명이 둘러서서 차례로 서명하는 그림은 널리 알려진 장면입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실제 서명 장소가 나무 아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미 모여서 거래하는 사람이 나무 한 그루 밑에 다 들어갈 규모를 넘었고, 문서는 실내에서 돌렸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나무는 오랫동안 그들이 모이던 장소의 상징이었고, 문서 이름도 그래서 붙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플라타너스는 1865년 폭풍에 쓰러졌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표지판만 남아 있습니다.
장소 이야기가 중요한 건, 이 시장이 곧 실내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1793년 중개인들은 월스트리트 82번지의 톤틴 커피하우스로 자리를 옮겨 거래를 이어 갔습니다. 당시 커피하우스는 지금의 카페가 아니었습니다. 상인들의 사무실이자 정보 교환소였죠.
어느 배가 어디에 들어왔는지, 어느 상인이 어음을 못 막았는지 같은 소식이 가장 먼저 도는 곳. 증권 거래가 자리 잡기에 이보다 알맞은 장소는 없었습니다.
실내로 들어간다는 건 단순한 이사가 아닙니다. 문이 생기면 누가 들어올 수 있는지 정할 수 있습니다. 모이는 시간을 정하고, 명단을 관리하고, 약속을 어긴 사람을 다음 모임에서 뺄 수도 있습니다. 규칙이 실제로 작동할 최소한의 조건이 그때 갖춰진 것입니다. 물론 그 규칙의 첫 수혜자는 문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었지만요.
1817년, 비로소 규칙이 생기다
합의문으로부터 25년이 지난 1817년, 이들은 정식 조직을 꾸립니다. 이름은 뉴욕 증권거래위원회. 규약을 만들고, 회장을 두고, 월스트리트 40번지에 방을 빌렸습니다. 1792년 서명자 가운데 네 명이 이 자리에 함께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생긴 규칙들은 오늘 우리가 아는 거래소의 원형입니다. 회장이 종목을 하나씩 호명하면 회원들이 그 종목의 값을 부르는 식으로 순서가 잡혔습니다. 아무 때나 아무 종목을 외치던 길바닥 방식과 비교하면, 이것만으로도 큰 진전이었습니다.
회원이 되려면 심사를 통과해야 했고, 회비와 벌금 규정도 있었습니다. 약속을 어긴 회원은 제재를 받았고, 심하면 자리를 잃었습니다. 회원 자격이 곧 재산이 되자, 회원들에게는 스스로 규칙을 지킬 이유가 생겼습니다.
여기에 진입장벽의 두 얼굴이 있습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는 조건은 경쟁을 줄여 회원들의 이익을 지켜 줍니다. 동시에 같은 조건이 거래 상대가 도망칠 확률을 낮춰, 시장 전체의 신뢰를 끌어올립니다. 1792년의 두 문장은 앞쪽에 가까웠고, 1817년의 규약은 뒤쪽으로 조금씩 옮겨 간 문서였습니다.
이 조직은 1863년 지금의 이름인 뉴욕증권거래소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1903년, 월가와 브로드가가 만나는 자리에 지금의 건물을 세웠습니다.

담합이 제도가 되기까지
거래소가 상장 기업에 숫자를 공개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한 건 19세기 후반부터입니다. 여기서도 회원들의 이익이 움직였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회사의 주식이 거래되다 사고가 나면, 상처를 입는 건 그 주식을 중개한 사람들의 평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재무 상태를 알려라, 발행 주식 수를 알려라, 이익을 보고하라는 요구가 나왔습니다. 제 밥그릇을 지키려던 동기가 결과적으로 투자자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흐른, 드문 경우입니다.
하지만 자발적인 요구만으로는 모자랐습니다. 1929년 대폭락 이후 미국은 1933년과 1934년에 걸쳐 증권 관련 법을 만들고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세웠습니다. 기업이 무엇을 공개해야 하는지, 거래소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가 이제 거래소 내부 규약이 아니라 법률로 정해졌습니다. 지금 한국 투자자가 전자공시시스템에서 사업보고서와 주요 사항 보고를 읽을 수 있는 것도 같은 계보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1792년의 수수료 하한선은 언제 사라졌을까요. 놀랄 만큼 오래 버텼습니다. 정해진 수수료율 체계가 완전히 폐지된 건 1975년 5월 1일. 미국에서는 이날을 메이데이라고 부릅니다. 첫 합의문으로부터 183년이 흐른 뒤였고, 그 뒤로 수수료는 경쟁의 영역으로 넘어가 계속 낮아졌습니다.
규칙은 언제나 사고 뒤에 온다
버튼우드 합의문 이야기가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세계 최대 시장의 출발점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선언이 아니라 동업자 담합에 가까웠다는 사실은 미화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실패담으로만 읽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규칙이 어떤 순서로 만들어지느냐입니다.
순서는 대체로 이렇습니다. 먼저 사고가 납니다. 다음엔 당사자들이 제 손해를 줄이려고 규칙을 만듭니다. 그 규칙이 자기들에게만 유리하다는 게 드러나면, 한참 뒤에 법이 손을 봅니다.
1792년의 공황, 1817년의 규약, 1934년의 법, 1975년의 수수료 자유화는 이 순서를 그대로 밟아 왔습니다. 규칙은 선의에서 태어나는 일이 드뭅니다. 대개 필요와 압력에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규칙이 있는 시장과 없는 시장의 차이는 큽니다. 1792년의 중개인들은 거래 상대가 다음 날 나타날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국의 개인투자자는 체결과 결제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상장 기업이 정해진 형식으로 숫자를 내도록 강제된 환경에서 거래하죠.
이건 공짜로 주어진 조건이 아닙니다. 200년 넘게 사고와 수정을 되풀이하며 쌓아 올린 결과물입니다.
그렇게 쌓인 장치 가운데 가장 힘이 센 것이 공시입니다. 기업이 스스로 숫자를 말하게 만드는 제도죠. 그런데 정작 그 숫자를 읽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공짜로 열려 있는 정보를 건너뛰고 남이 전해 주는 이야기로 판단한다면, 우리는 200년 전 길바닥에서 값을 외치던 시절로 제 발로 돌아가는 셈입니다.
1792년 5월의 그 종이는 두 문장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시장은 그 두 문장에 수백 년 동안 조항이 덧붙어 만들어졌고, 그 조항 하나하나는 대개 누군가 크게 잃은 뒤에 생겼습니다. 나무 아래 스물네 명의 낭만적인 그림보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편이 아마 더 쓸모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