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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시가 잠수함 17척을 받은 진짜 이유

한 척에 15만 달러. 1989년 봄, 미국 신문에 실린 한 줄짜리 기사에 적힌 잠수함 값입니다. 펩시콜라가 소련에서 잠수함 17척을 이 값에 사들였고, 여기에 순양함과 구축함, 호위함도 한 척씩 딸려 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5만 달러면 당시 미국에서 고급 주택 한 채 값. 잠수함이 집 한 채 값이라는 대목에서 사람들은 멈춰 서서 기사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뒤 30년 넘게 인터넷을 떠돌았고, 떠도는 사이 꼬리가 붙었습니다. 펩시가 한때 세계 6위 규모의 해군을 거느렸다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펩시가 넘겨받은 배들은 이미 퇴역한 고철이었습니다. 무기도 승조원도 없었고, 스스로 항해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펩시는 배를 받자마자 노르웨이의 해체 업체로 넘겼습니다. 군함을 거느린 게 아니라 중개를 한 겁니다.

그래도 과장을 걷어 내면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콜라 회사가 왜 남의 나라 퇴역 군함을 받아서 고철로 팔아야 했을까요. 이 질문의 답이 사건의 진짜 알맹이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군사도 외교도 아닌, 돈에 관한 것입니다.

루블로는 콜라값을 받을 수 없었다

소련 돈 루블은 국제적으로 바꿔 주지 않는 돈이었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비교환성 통화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소련 안에서는 돈이지만, 국경을 넘으면 종이에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환율도 정부가 정해 발표하는 숫자일 뿐, 그 숫자대로 루블을 달러로 바꿔 주는 은행은 세계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소련 국민이 루블을 외국으로 들고 나가는 것 자체가 법으로 금지돼 있었죠.

그래서 소련이 외국 물건을 사려면 달러나 금 같은 '경화', 즉 국제적으로 통하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그 경화가 늘 모자랐다는 점입니다. 손에 들어온 달러는 곡물과 기계, 공장 설비에 먼저 써야 했습니다. 체제의 생존이 걸린 품목들이죠. 그 귀한 달러를 청량음료 원액값으로 내보내는 결정은 어떤 계획 당국도 승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소련과 서방 기업의 거래에서는 대금을 물건으로 치르는 일이 흔했습니다. 기계를 들여오고 원유나 목재로 갚거나, 공장을 지어 주고 그 공장에서 나온 제품으로 대금을 받는 식입니다. 다만 이런 거래는 늘 성가신 숙제를 남겼습니다. 받은 물건을 어디에 팔지, 안 팔리면 손실은 누가 떠안을지를 매번 따로 정해야 했으니까요.

펩시 쪽 사정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련 사람들에게 콜라를 팔아 루블을 산더미처럼 받아도, 그 루블을 뉴욕으로 가져와 달러로 바꿀 방법이 없었습니다. 양쪽이 찾은 해법은 돈을 아예 건너뛰는 것이었습니다. 물건과 물건을 맞바꾸는 구상무역, 쉽게 말해 물물교환입니다. 20세기 후반 세계 최대 규모의 기업 하나가 이 원시적인 방식으로 돌아간 이유는 체제 경쟁이 아니라 통화의 신용 문제였습니다.

1959년, 흐루쇼프가 받아 든 종이컵

이 거래의 뿌리는 1959년 모스크바 소콜니키 공원에서 열린 미국 국립 전시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미국식 생활 수준을 소련 사람들에게 보여 주겠다는 기획이었고, 현장에는 리처드 닉슨 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이 함께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이 모형 주방 앞에서 어느 체제가 더 나은 삶을 주느냐를 두고 벌인 설전이 훗날 '주방 논쟁'으로 불리는 장면입니다.

기자들 앞에서 대화하는 닉슨과 흐루쇼프
1959년 모스크바 미국 국립 전시회에서 논쟁하는 닉슨 부통령과 흐루쇼프 총리.닉슨 대통령 도서관·박물관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그 자리에 펩시의 해외 부문 책임자 도널드 켄달이 있었습니다. 그는 흐루쇼프에게 종이컵 두 개를 건넸습니다. 하나는 미국에서 가져온 원액으로 만든 펩시,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 현지의 물로 만든 펩시. 흐루쇼프는 모스크바 쪽이 더 낫다고 평했습니다. 미국 제품을 손에 든 소련 지도자의 사진은 전 세계로 퍼졌고, 켄달은 이 사진 한 장으로 회사 안에서 결정적인 입지를 얻었습니다.

켄달은 1963년 펩시콜라의 최고경영자가 됐고, 모스크바에서 맺은 인연을 10년 넘게 공들여 가꿨습니다. 결실은 1972년에 나왔습니다. 펩시가 소련에 콜라 원액을 공급하고 현지에서 병에 담아 팔 독점권을 따낸 겁니다. 자본주의 소비재가 소련 시장에 정식으로 들어간 첫 사례였습니다. 이 독점 조항 때문에 코카콜라는 1985년까지 소련에 발을 들이지 못했습니다.

대금은 보드카로 받았습니다. 소련은 콜라 원액을 받는 대신 스톨리치나야 보드카의 미국 내 독점 판매권을 펩시에 넘겼고, 펩시는 이 보드카를 미국에서 팔아 달러를 거둬들였습니다. 거래는 양쪽 모두에게 성공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스톨리치나야 판매량은 1970년대를 거치며 수십 배로 뛰었습니다.

소련 쪽 성적도 눈부셨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한 해에 10억 잔 가까운 펩시가 팔려 나갔습니다. 1988년에는 마이클 잭슨이 나오는 펩시 광고가 소련 국영 방송을 탔습니다. 소련 TV 역사상 첫 유료 광고였습니다.

보드카가 막히자 배가 등장하다

문제는 보드카로 받을 수 있는 대금에 한계가 왔다는 점입니다. 소련의 콜라 수요는 계속 늘었지만 미국의 보드카 시장은 그만큼 커지지 않았습니다. 결정타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소련산 제품 불매 운동이 번지면서 스톨리치나야 판매가 멈춰 섰습니다. 콜라를 더 받고 싶은 소련과 보드카를 더 받을 수 없는 펩시. 둘 사이에서 맞바꿀 물건을 새로 찾아야 했습니다.

소련이 내놓을 수 있는 물건 가운데 서방에서 곧바로 현금이 되는 건 많지 않았습니다. 마침 군축 분위기와 경제난이 겹쳐 퇴역 함정이 쌓여 있었고, 고철은 세계 어디서나 무게로 값이 매겨지는 상품이었습니다. 1989년 봄에 성사된 거래가 바로 이것입니다. 디젤 추진 잠수함 17척과 순양함·구축함·호위함 각 한 척을 펩시가 넘겨받되, 배들은 곧장 노르웨이의 조선소로 보내 해체했습니다. 펩시가 받은 건 함대가 아니라 고철 대금이었습니다.

부두에 정박한 낡은 잠수함
미국 프로비던스에 정박해 있던 퇴역 소련 잠수함 K-77.Richard Connors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같은 해 맺은 더 큰 계약은 상선 쪽이었습니다. 펩시는 소련 무역기구, 노르웨이의 두 회사와 함께 10년에 걸쳐 소련에서 만든 선박을 최대 85척까지 넘겨받아 서방에 팔거나 빌려주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규모는 26억 달러에 가까웠습니다. 배를 팔고, 팔리지 않을 위험을 떠안는 일은 노르웨이 회사들이 맡았습니다. 펩시는 그 수익을 소련 안에 공장을 늘리는 데 썼습니다. 퇴역 잠수함 이야기가 유명해지는 동안, 실제로 돈이 움직인 쪽은 유조선과 화물선이었던 셈입니다.

규모를 따져 보면 이 방식이 왜 계속 이어졌는지 보입니다. 1985년 무렵 소련에 들어선 펩시 병입 공장은 16곳이었고, 배를 대금으로 받는 구조가 돌아가면서 공장 수는 그 두 배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콜라 원액이 들어가고, 고철과 선박이 나오고, 그 돈이 다시 공장으로 들어가는 순환이었습니다. 한쪽에 달러가 없다는 조건만 빼면 지극히 평범한 사업 확장이었죠.

이 무렵 켄달이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에게 던졌다는 농담은 지금도 자주 인용됩니다. 우리가 당신들보다 소련의 무장을 더 빨리 해제하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농담이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습니다. 군함을 줄이자고 머리를 맞댄 쪽은 협상 테이블이었지만, 실제로 함정을 해체장으로 보낸 쪽은 콜라 회사의 대금 결제였습니다.

'세계 6위 해군'은 어디서 나왔나

그렇다면 세계 6위 해군이라는 말은 어디서 시작됐을까요. 연구자들이 추적해 보니 출발점은 1989년 5월 미국 신문의 한 칼럼이었습니다. 펩시가 잠수함 17척을 한 척당 15만 달러에 샀다는 문장이 거기 실렸고, 이 문장은 이후 고쳐지거나 보완되지 않은 채 남았습니다. 잠수함 숫자만 떼어 보면 웬만한 나라의 보유량을 웃도는 수치였으니, 뒷사람들이 순위를 붙이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국제정치 연구자 폴 머스그레이브는 이 이야기를 하나하나 뜯어봤습니다. 배들은 작고 낡았고 항해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인수와 거의 동시에 해체 업체로 넘어갔습니다. 그는 펩시를 해양 강국이라기보다 중개인에 가까웠다고 정리했습니다. 고물 자동차가 가득한 차고를 두고 스스로를 자동차 경주팀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는 비유도 곁들였습니다.

더 깐깐한 지적도 있습니다. 해군사를 다루는 연구자 가운데는 펩시가 그 고철을 물리적으로 소유한 적이 있기는 한지조차 의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소련 무역기구와 노르웨이 업체 사이의 거래에 펩시가 대금 정산의 한 축으로 끼었을 뿐이라는 해석입니다. 서류상 어디까지가 펩시의 소유였는지는 공개된 자료로는 또렷하지 않습니다.

절단 토치로 잠수함 선체를 자르는 작업자
러시아 세베로드빈스크의 조선소에서 오스카급 잠수함을 해체하는 모습.Todd P. Cichonowicz, 미 해군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이 이야기가 주기적으로 되살아나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서방 기업들의 러시아 사업이 화제가 됐을 때, 펩시가 세계 6위 해군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다시 널리 퍼졌습니다. 미국의 사실 검증 매체들이 그때 또 한 번 이 주장을 바로잡았죠. 흥미로운 이야기는 정정 기사보다 훨씬 빨리, 훨씬 멀리 갑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소련이 콜라 대금을 퇴역 함정으로 치렀다는 사실 자체는 맞습니다. 펩시가 그 배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해군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틀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정말 눈여겨볼 대목은 잠수함의 숫자가 아닙니다. 한 나라의 돈이 국경 밖에서 힘을 잃었을 때, 기업이 어디까지 뒷걸음질 쳐야 하느냐입니다.

나라가 사라지자 계약도 사라졌다

1990년 4월 9일, 펩시는 소련과 30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발표했습니다. 그때까지 미국 기업과 소련 사이에 맺어진 가장 큰 거래였습니다. 10년에 걸쳐 유조선과 화물선 10척 이상을 새로 지어 넘겨받고, 그 수익으로 소련 안에 병입 공장을 늘리고 피자헛 매장까지 여는 구상이었습니다. 콜라 한 병에서 시작한 물물교환이 조선업과 외식업으로까지 번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1년 12월, 계약의 상대방이 사라졌습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펩시가 상대해야 할 정부는 하나에서 열다섯으로 늘었습니다. 켄달은 훗날 소련이 사실상 폐업해 버렸다는 말로 그때의 심정을 전했습니다. 계약서에 적힌 나라가 없어지면 그 계약서는 무엇이 되는가. 당시에는 참고할 선례조차 없었습니다.

가장 곤란해진 건 짓고 있던 배들이었습니다. 조선소는 독립국이 된 우크라이나에 있었고, 우크라이나는 그 배를 팔아 생기는 수익을 자기 몫으로 요구했습니다. 피자헛 사업도 비슷하게 흩어졌습니다. 치즈는 리투아니아에서, 플라스틱 용기는 벨라루스에서 오던 것이 하루아침에 별개 나라와의 수입 협상으로 바뀌었습니다. 펩시는 그 뒤 몇 년을 각국 정부와 다시 협상하는 데 썼습니다.

그 사이 코카콜라가 밀고 들어왔습니다. 한때 독점을 누렸던 시장에서 펩시는 먼저 들어간 이점을 빠르게 잃었고, 러시아에서 콜라 하면 코카콜라가 떠오르는 쪽으로 판이 뒤집혔습니다. 켄달은 2020년 9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59년 종이컵 두 개로 시작해 잠수함 17척을 거쳐 소련의 소멸까지. 한 사람의 경력이 냉전 경제사의 한 줄기를 고스란히 따라간 셈입니다.

돈이 돈 노릇을 못 할 때

이 이야기 한가운데에는 '돈은 무엇으로 돈이 되는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소련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군사력과 우주 기술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돈은 국경을 넘는 순간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화폐의 힘은 인쇄된 숫자나 정부의 선언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받아 줄 거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20세기 후반의 거대 기업도 고철과 보드카를 세며 장부를 맞춰야 합니다.

교환 수단이 막히면 거래 비용이 얼마나 불어나는지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보드카를 팔 시장을 찾고, 배를 팔아 줄 노르웨이 회사를 끼우고, 고철 시세를 따지고, 그 모든 위험을 누가 질지 협상하는 일. 어느 것도 콜라 회사가 원래 하던 일이 아닙니다. 돈이 제 구실을 하면 이 모든 과정이 계좌 이체 한 번으로 끝납니다. 평소엔 보이지 않던 통화의 기능은 사라지고 나서야 그 크기를 드러냅니다.

이 사건은 숫자가 어떻게 전설이 되는지도 보여 줍니다. 신문의 한 문장이 30년 넘게 사실처럼 인용되는 동안, 그 배들이 이미 고철이었다는 조건은 조용히 떨어져 나갔습니다. 투자 판단에서도 같은 일이 흔히 벌어집니다. 어디선가 본 인상적인 숫자는 오래 기억에 남고, 그 숫자에 붙어 있던 조건과 맥락은 가장 먼저 잊힙니다.

그 숫자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세지 않았는지 되묻는 습관. 이야기와 사실을 가르는 도구는 거의 그것 하나뿐입니다. 잠수함 17척의 전설이 정정 기사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도, 그 질문이 언제나 이야기의 재미보다 한발 늦게 도착하기 때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