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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이 무너진 자리에 철길은 남았습니다

1845년 여름, 영국 의회에는 일주일에 열두 건꼴로 새 철도 계획서가 쌓였습니다. 그해 접수된 철도 설립 신청은 모두 199건. 이듬해인 1846년에는 572건으로 불어났습니다. 바로 전해인 1844년에는 63건이었으니, 2년 만에 아홉 배가 된 셈입니다.

신문에는 측량조차 끝나지 않은 노선의 청약 광고가 몇 면씩 실렸습니다. 같은 두 도시를 잇겠다는 회사가 서너 곳씩 겹쳤고, 그중 상당수는 사무실 주소와 이사 명단만 있는 종이 회사였습니다. 그런데도 청약 창구 앞에는 줄이 늘어섰습니다. 사람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철도가 세상을 바꾼다는 판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거든요.

이 이야기가 특별한 건 결말 때문입니다. 거품은 어김없이 꺼졌고 수많은 가정이 파산했습니다. 그런데 그 광풍이 깔아 놓은 철길 상당수는 오늘날까지도 영국에서 기차가 다니는 노선으로 남아 있습니다. 돈은 사라졌는데 자산은 남은, 흔치 않은 거품입니다.

확신은 실적에서 나왔습니다

영국의 철도 열풍은 근거 없는 망상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1830년대에 먼저 문을 연 몇몇 간선 철도는 실제로 돈을 벌었습니다. 마차로 사흘 걸리던 거리를 반나절에 달렸고, 석탄과 면직물과 우편물이 철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철도 회사들이 해마다 꼬박꼬박 배당을 주자, 철도는 위험한 모험이 아니라 검증된 사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때도 절묘했습니다. 1840년대 중반 영국은 경기가 좋았고, 잉글랜드은행이 금리를 낮추면서 국채 이자는 시시해졌습니다. 은행에 넣어 두거나 국채를 사서 받는 이자보다 철도주 배당이 훨씬 커 보였죠.

돈을 들고 온 사람들도 새 얼굴이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돈을 모은 중산층, 그러니까 변호사와 의사, 상점 주인과 성직자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저축이 처음으로 대규모로 주식시장에 흘러든 시기였습니다.

규모를 가늠할 숫자가 있습니다. 이 시기 영국의 철도 부문 투자는 한 해 GDP(국내총생산)의 6퍼센트 수준까지 올라갔습니다. GDP는 한 나라가 1년 동안 만들어 낸 부가가치를 모두 더한 값입니다. 직전의 철도 붐 때 이 비율이 2퍼센트 정도였으니, 나라 전체가 한 업종에 돈을 쏟아부은 셈입니다.

1845년부터 1847년 사이에 의회가 승인한 노선만 8,590마일이었습니다. 1842년 이전까지 영국 전체에 깔린 철길은 2,000마일에도 못 미쳤습니다. 몇 해 사이에, 그때까지 깔린 철길 전부보다 몇 배 긴 노선이 서류 위에서 승인된 겁니다.

계약금 10퍼센트라는 문

광풍을 온 나라의 일로 만든 건 청약 구조였습니다. 당시 철도 회사 주식은 액면가 전액을 한 번에 내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보통 10퍼센트 안팎의 계약금만 내면 청약이 됐습니다. 나머지는 공사가 진행되는 몇 년에 걸쳐, 회사가 필요할 때마다 나눠서 청구했습니다. 이 추가 납입 요구를 '콜'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구조가 낳는 결과를 따라가 보면 섬뜩합니다. 100파운드짜리 주식을 10파운드만 내고 잡을 수 있으니, 같은 돈으로 열 배 규모를 청약할 수 있었습니다. 주가가 20퍼센트만 올라도 계약금 대비 수익률은 200퍼센트가 됩니다.

자기 돈보다 큰 규모로 투자하는 이런 방식을 레버리지, 우리말로 지렛대 효과라고 합니다. 오를 때는 수익이 몇 배로 불어납니다. 거꾸로 갈 때는 손실도 똑같이 몇 배가 됩니다.

잔금을 낼 생각이 애초에 없는 사람들도 몰려들었습니다. 계약금만 걸어 두고, 웃돈을 받아 청약권을 넘기는 거래가 성행한 겁니다. 당시 영국 사람들은 이런 단기 청약자에게 '수사슴'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남은 대금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는 아무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훗날 의회 조사에서 드러난 사례 하나가 이 시기의 공기를 요약합니다. 3만 7,500파운드어치 주식을 청약한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주급 1기니를 받는 청소부의 아들들로, 다락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지만, 계약금만 내면 되는 구조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잔금 청구서가 날아오는 날부터 시작됩니다.

신문은 왜 말리지 않았을까

이 시기 언론의 모습은 지금 읽어도 낯설지 않습니다. 철도 회사가 청약자를 모으려면 신문에 긴 안내문을 실어야 했고, 그 광고비는 신문사로 들어갔습니다. 이사진 명단과 자본금 규모, 청약 방법을 빼곡히 적은 광고는 노선 하나당 지면을 몇 면씩 차지했습니다. 철도 계획이 늘어날수록 신문사 수입도 늘어나는 구조였습니다.

철도만 다루는 전문지도 쏟아졌습니다. 1845년 영국에서 나오던 철도 관련 정기간행물은 열여섯 종에 이르렀고, 같은 시기 새로 생긴 증권거래소만 열다섯 곳이었습니다. 정보를 대는 쪽도, 거래를 중개하는 쪽도 붐이 길어질수록 돈을 버는 자리에 서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이 시기 언론을 통째로 공범으로 몰기는 어렵습니다. 타임스와 이코노미스트 같은 매체는 철도 광고로 수입을 올리면서도, 사설에서는 철도 지출이 나라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1845년 10월 철도 전용 감시 지면을 따로 만들어 회사들의 실태를 추적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 경고가 청약 광고 바로 옆에 실렸다는 점입니다. 같은 지면에서 한쪽은 위험을 말하고, 다른 쪽은 청약을 권합니다. 독자들의 눈이 어느 쪽으로 갔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1845년 10월, 금리 0.5퍼센트의 무게

정점은 1845년 여름이었습니다. 철도주는 그해 초부터 여름까지 40퍼센트가량 올랐고, 새 청약은 나오는 족족 팔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10월 초, 잉글랜드은행이 기준금리를 0.5퍼센트포인트 올렸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대단치 않은 인상폭입니다.

하지만 계약금 10퍼센트로 쌓아 올린 탑에는 이 정도 바람도 치명적이었습니다. 금리가 오르자 돈을 빌려 청약을 이어 가던 사람들의 계산이 무너졌고, 국채 이자가 다시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달 철도주는 곤두박질쳤습니다. 당시 대표 종목이던 그레이트웨스턴철도는 8월 고점에서 10월까지 40퍼센트 떨어졌습니다.

진짜 잔인한 대목은 여기서부터입니다. 주가가 떨어지자 청약자들은 팔고 빠져나오려 했지만, 공사는 이미 시작된 뒤였습니다. 철도 회사들은 계획대로 잔금을 청구했습니다. 이미 반 토막 난 주식에 대해, 원래 약속한 나머지 90퍼센트를 내라는 청구서가 집집마다 날아든 겁니다.

계약금만 걸고 웃돈을 노린 사람들, 감당 못 할 규모로 청약한 사람들이 이때 무너졌습니다. 잔금을 못 내면 이미 낸 계약금을 잃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납금을 법적으로 추궁당했습니다. 집을 팔고 가업을 정리한 가정이 줄을 이었습니다. 팔면 끝나는 손실이 아니었습니다. 팔고 나서도 청구서가 따라오는 구조였습니다.

하락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철도주 지수는 1845년 고점에서 1850년 4월까지 약 66퍼센트 떨어졌습니다. 1848년 기준으로 철도주는 영국 증시 시가총액의 71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한 업종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 금융의 문제였던 셈입니다.

철도왕의 추락

이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이 조지 허드슨입니다. 요크의 포목상 출신인 그는 철도 회사들을 사들이고 합치며 잉글랜드 북부와 중부의 노선망을 손에 넣었습니다. 1844년 한 인사가 그를 '철도왕'이라 부른 뒤로 그 별명이 굳었습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됐고, 그가 어느 노선을 산다는 소문만 돌아도 주가가 움직였습니다.

조지 허드슨을 그린 흑백 석판화
'증기를 올릴 줄 아는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철도왕' 조지 허드슨을 그린 석판화.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그런데 그의 경영 방식에는 치명적인 구멍이 있었습니다. 회사가 벌어들인 이익이 아니라 주주들이 낸 자본금에서 배당을 준 것입니다. 쉽게 말해 새로 들어온 투자자의 돈을 기존 투자자에게 배당이라는 이름으로 나눠 준 셈입니다. 배당이 계속 나오니 회사는 건실해 보였고, 건실해 보이니 새 돈이 계속 들어왔습니다. 자기가 가진 주식을 자기가 지배하는 회사에 비싸게 파는 자전 거래도 있었습니다.

주가가 오르는 동안에는 아무도 장부를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배당이 줄고 주가가 무너지자 주주들이 조사위원회를 꾸렸고, 1849년 그의 회계 방식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약 75만 파운드를 돌려놓으라는 요구를 받았고, 모든 철도 회사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영지를 팔아 빚을 갚았습니다.

그 뒤의 삶은 쓸쓸했습니다. 1859년 의원직을 잃은 뒤 채권자를 피해 유럽 대륙으로 떠났고, 빚을 못 갚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던 채무자 수감 제도가 폐지된 1870년 이후에야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871년 12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철도왕으로 만들어 준 도시 요크에서는 그래도 예를 갖춘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조지 허드슨 기념 명판
'철도왕' 조지 허드슨을 기리는 명판.Keith Seabridge · CC BY 2.0 · 위키미디어 공용

그래도 철길은 남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거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영국 철도 광풍에는 다른 대목이 하나 더 있습니다. 거품이 꺼진 뒤 남은 것이 종잇조각이 아니라 철과 자갈과 터널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사라진 것도 많았습니다. 광풍의 절정기에 승인된 노선 가운데 3,560마일은 끝내 착공되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인가된 계획의 5분의 2 남짓이 허공으로 날아간 셈입니다.

하지만 나머지는 실제로 깔렸습니다. 영국의 철도망은 1842년부터 1850년 사이에 세 배로 늘어 6,123마일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영국 철도망이 1만 마일에 조금 못 미치니, 지금 노선의 상당 부분이 이 짧은 광풍기에 뼈대를 갖춘 셈입니다. 공사가 한창이던 때는 아일랜드 대기근과도 겹쳐, 일자리를 찾아 건너온 노동자들에게 생계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파산한 회사들의 노선은 헐값에 넘어갔습니다. 살아남은 큰 회사들이 무너진 회사의 철길을 실제 가치보다 한참 싼 값에 사들여 자기 노선망에 이어 붙였습니다. 처음 돈을 댄 주주들은 거의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돈으로 만든 물리적 자산은 사라지지 않고, 주인만 바뀐 채 계속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두 얼굴로 기록됩니다. 개인 투자자에게는 가혹한 손실이었고, 국가 경제로서는 수십 년치 인프라를 한꺼번에 앞당겨 지은 사건이었습니다. 거품이 사회 전체에 남긴 것과 참여자 개인에게 남긴 것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 이 시기만큼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도 드뭅니다.

1845년의 줄에서 배울 것

철도 광풍에서 사람들을 무너뜨린 건 틀린 전망이 아니었습니다. 철도가 세상을 바꿀 거라는 판단은 옳았고,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그들이 무너진 건 옳은 전망에 감당할 수 없는 크기로 올라탔기 때문입니다. 방향이 맞아도 버티지 못하면 결과를 볼 수 없습니다.

계약금 10퍼센트라는 구조가 특히 그렇습니다. 적은 돈으로 큰 자리를 잡는 방식은 언제나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구조의 본질은 지금 내는 돈이 아니라 나중에 내야 할 의무에 있습니다. 오를 때는 아무도 그 의무를 계산하지 않고, 내릴 때는 그 의무가 가장 나쁜 순간에 도착합니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하나입니다. 내 손실이 내가 넣은 돈에서 멈추는지, 아니면 그 이상을 요구받을 수 있는지.

정보를 주는 쪽의 이해관계를 살피는 습관도 여전히 쓸모 있습니다. 1845년의 신문사는 철도 청약이 늘수록 수입이 느는 자리에 있었고, 증권거래소와 전문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전한 정보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어떤 이야기가 유난히 크고 자주 들릴 때, 그 이야기를 전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한 번 되짚어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마지막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1845년에 청약한 사람과 1850년에 헐값으로 노선을 사들인 사람은 같은 철길을 두고 정반대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좋은 자산이라는 판단과, 지금 사도 되는 가격이라는 판단은 전혀 다른 질문입니다. 두 질문을 섞어 묻는 순간, 우리는 1845년의 그 청약 창구 앞 줄에 다시 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