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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만에 6조 개가 찍힌 코인

2022년 5월 13일, 루나라는 코인의 발행량이 약 6조 5천억 개를 찍었습니다. 엿새 전인 5월 7일만 해도 약 3억 5천만 개였습니다. 오타가 아닙니다. 사흘 남짓한 사이에 발행량이 1만 8천 배 넘게 불어났고, 그 숫자는 실제로 그렇게 찍혀 나왔습니다.

같은 시기 루나의 짝, 테라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테라는 1개가 늘 1달러 값을 하도록 설계된 코인이었습니다. 5월 6일까지 발행 규모는 약 187억 달러. 그중 75퍼센트가 연 19.5퍼센트 이자를 주는 예금 서비스 한 곳에 잠겨 있었습니다.

일주일 뒤 테라는 0.15달러 선까지 내려갔습니다. 루나는 0.00005달러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된 겁니다. 미국 검찰은 이 붕괴로 투자자들이 잃은 돈이 400억 달러를 넘는다고 집계했습니다.

만든 사람은 한국 사람이었고, 산 사람 중에도 한국 사람이 많았습니다. 2022년 5월 금융당국은 국내 루나 보유자를 약 28만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한국 개인투자자에게 이보다 가까운 금융 사고도, 이보다 설명이 더 필요한 사고도 드뭅니다. 이 글은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기보다, 그 구조가 왜 버틸 수 없었는지를 처음부터 차례로 따라가 봅니다.

가격이 흔들리지 않는 코인, 어떻게 가능할까

스테이블코인은 이름 그대로 가격이 흔들리지 않는 코인입니다. 비트코인처럼 하루에 10퍼센트씩 오르내리는 자산으로는 결제도, 송금도 하기 어렵죠. 그래서 1개가 늘 1달러 값을 하도록 만든 코인이 등장했습니다. 가상자산 시장 안에서 현금 대신 들고 있거나, 거래소 사이를 오갈 때 주로 쓰입니다.

그럼 1달러 값은 어떻게 지킬까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진짜 달러를 쌓아 두는 겁니다. 코인 1개를 발행할 때마다 은행 계좌에 1달러, 또는 1달러어치 미국 단기 국채를 넣어 둡니다. 누가 코인을 들고 와 달러로 바꿔 달라고 하면 그 돈으로 내주면 됩니다. 이른바 준비금 방식, 또는 담보 방식입니다.

이 방식에도 약점은 있습니다. 금고 안을 바깥에서 들여다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담보 방식을 둘러싼 논쟁은 늘 한 가지 질문으로 모입니다. 그 돈이 정말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반대편에는 알고리즘 방식이 있습니다. 달러를 쌓아 두지 않고,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규칙만으로 가격을 1달러에 붙들어 두려는 시도입니다. 가격이 1달러보다 낮으면 유통량을 줄이고, 높으면 늘립니다. 중앙은행이 돈을 풀고 거둬들이며 물가를 관리하는 방식을 코드로 흉내 냈다고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 방식에는 분명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달러를 쌓을 필요가 없으니 은행도, 감독기관도, 회계감사도 거치지 않고 몸집을 키울 수 있습니다. 담보 없이 규칙과 신뢰만으로 굴러가는 화폐. 그 발상 자체가 많은 개발자를 끌어당겼습니다. 테라는 이 발상을 가장 크게, 가장 멀리까지 밀어붙인 사례였습니다.

테라와 루나, 서로를 떠받치던 쌍둥이

테라폼랩스는 2018년 권도형과 신현성이 함께 세운 회사입니다. 이 회사가 만든 테라 블록체인에는 코인 두 개가 올라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1달러에 고정되도록 설계된 테라, 다른 하나는 가격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루나. 둘은 남남이 아니라, 하나의 규칙으로 묶인 쌍둥이였습니다.

규칙은 한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언제든 1테라를 1달러어치 루나로, 1달러어치 루나를 1테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눈여겨볼 대목은 '1달러어치'라는 표현입니다. 루나가 100달러면 루나 0.01개가, 1달러면 루나 1개가 1테라와 교환됩니다. 그리고 교환할 때 들어온 쪽은 소각, 즉 영구히 없어지고 나가는 쪽은 새로 발행됩니다.

이 규칙이 어떻게 가격을 붙잡아 두는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테라가 시장에서 0.98달러에 거래된다고 해 보죠. 누구든 0.98달러를 주고 1테라를 산 뒤, 규칙대로 1달러어치 루나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앉은자리에서 0.02달러가 남습니다. 이렇게 가격 차이만 노리고 사고파는 것을 차익거래라고 합니다. 차익거래가 일어나면 테라는 소각되어 시장에서 사라지고, 그만큼 루나가 새로 생깁니다.

테라 유통량이 줄면 가격은 다시 1달러 쪽으로 밀려 올라갑니다. 반대 방향도 똑같습니다. 테라가 1.02달러라면 1달러어치 루나를 1테라로 바꿔 시장에 파는 쪽이 이익입니다. 이번에는 루나가 소각되고 테라가 새로 발행되니, 테라가 늘어나 가격이 1달러로 내려옵니다. 누군가의 판단이나 선의가 아니라, 각자의 이익 추구가 가격을 제자리로 데려다 놓는 설계였습니다.

2021년부터 2022년 초까지는 이 구조가 실제로 잘 굴러갔습니다. 테라를 찾는 사람이 늘수록 테라를 찍기 위해 루나가 꾸준히 소각됐고, 루나가 줄어드니 루나 값이 올랐습니다. 루나 값이 오르면 1달러어치를 만드는 데 필요한 루나 개수가 줄어, 구조는 더 튼튼해 보였습니다. 2022년 4월 5일, 루나는 119.18달러까지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설계에는 처음부터 깔린 전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테라의 가치를 받치는 담보가 달러가 아니라 루나, 즉 같은 생태계가 스스로 찍어 낸 코인이라는 점입니다. 금고 안에 든 것이 바깥 자산이 아니라 자기가 찍은 종이였던 셈이죠. 그래서 이런 설계에는 '내생적 담보', 곧 담보가 바깥에서 들어오지 않고 안에서 생겨났다는 이름이 붙습니다.

테라가 187억 달러 규모로 불어났을 때, 그것을 떠받친 건 루나 시가총액에 대한 시장의 믿음 하나였습니다. 2022년 5월 7일 루나의 시가총액은 약 410억 달러. 믿음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넉넉해 보이는 숫자였습니다.

연 19.5퍼센트, 그 이자는 어디서 왔을까

테라가 그렇게까지 커진 데는 결정적인 미끼가 있었습니다. 테라 블록체인 위에서 돌아가던 예금 서비스, 앵커 프로토콜입니다. 여기에 테라를 맡기면 연 19.5퍼센트 이자를 줬습니다. 흔히 '연 20퍼센트'로 불렸고, 실제로 이 숫자가 사람들이 테라를 사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앵커가 얼마나 빨리 커졌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2021년 6월 중순 앵커에 맡겨진 테라는 약 3억 6천만 달러어치였습니다. 2022년 5월 1일에는 약 137억 달러, 5월 6일에는 약 141억 달러까지 늘었습니다. 그날 기준으로 전체 테라 유통량의 약 75퍼센트가 앵커 한 곳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테라라는 코인의 수요가 사실상 이자 상품 하나에 매달려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자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설계상으로는 돈을 빌려 간 사람들이 내는 이자가 재원이었습니다. 앵커는 예금을 받아 대출을 내주고, 대출 이자와 담보로 잡아 둔 자산에서 나오는 수익을 예금자에게 나눠 주는 구조였죠. 문제는 연 19.5퍼센트를 채울 만큼 빌려 가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들어오는 돈보다 내줘야 할 이자가 늘 많았습니다.

모자란 돈은 '이자 준비금'이라는 별도 자금으로 메웠습니다. 2022년 2월에는 루나파운데이션가드(LFG)가 이 준비금에 4억 5천만 달러를 넣는 안을 승인했습니다. 그 전에도 테라폼랩스가 두 차례 준비금을 채워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22년 4월에는 하루에 들어가는 보조금이 약 600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하루 600만 달러면 한 달에 1억 8천만 달러입니다. 게다가 예금이 늘면 그 부담도 같은 속도로 불어납니다. 잘될수록 돈이 더 빨리 마르는 구조였던 거죠. 당시 여러 분석가가 이 준비금이 몇 달 안에 바닥난다는 계산을 공개했고, 커뮤니티에서는 2022년 5월 1일부터 이자율을 단계적으로 내리는 안이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자를 내리면 테라를 들고 있을 이유도 함께 사라집니다. 실제로 2022년 4월 중순부터 앵커로 들어오는 돈은 눈에 띄게 줄고, 빠져나가는 돈은 늘기 시작했습니다. 균열은 5월에 갑자기 생긴 게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몇 주 앞서, 이미 조용히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2022년 5월 7일, 첫 균열

사실 테라가 1달러를 놓친 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2021년 5월, 테라 가격은 0.92달러 아래까지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며칠 뒤 가격은 1달러로 돌아왔고, 권도형은 테라 프로토콜이 스스로 가격을 회복했다고 공개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알고리즘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서사가 그때 만들어졌습니다.

미국 검찰의 설명은 다릅니다. 그때 가격을 되돌린 건 알고리즘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검찰에 따르면 권도형은 한 고빈도 매매 회사와 합의했고, 그 회사가 수백만 달러어치 테라를 사들여 가격을 받쳐 줬습니다. 그러고도 이 사실은 알리지 않은 채 알고리즘의 성공으로 설명했다는 것이 검찰의 공소사실이었습니다.

이 대비가 중요한 이유는 규모에 있습니다. 2021년 5월 테라 발행 규모는 약 19억 달러였습니다. 2022년 5월에는 약 187억 달러. 한 해 사이 아홉 배 가까이 커졌지만, 그것을 받쳐 줄 방법은 그만큼 커지지 않았습니다.

2022년 5월 7일 토요일, 큰 지갑 두 개가 앵커에서 3억 7천 5백만 테라를 한꺼번에 뺐습니다. 같은 날 커브 파이낸스라는 교환 풀에서도 3억 5천만 달러 안팎의 테라가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커브는 스테이블코인끼리 서로 바꿀 수 있도록 자금을 모아 둔 곳입니다. 여기 고인 돈이 얇아지면, 큰 금액을 1달러 근처에서 바꾸기가 어려워집니다. 이날 테라 가격은 처음으로 0.99달러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LFG는 그날 밤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테라 생태계의 준비자산을 관리하겠다며 2022년에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개입은 먹히는 듯했습니다. 테라 가격은 0.995달러 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말 밤의 일이었고, 많은 사람이 지난해처럼 지나갈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 배경도 있었습니다. 4월 초 권도형은 다른 프로젝트들과 함께 새 교환 풀을 만들겠다고 발표했고, 그 과정에서 기존 커브 풀의 자금이 옮겨 갈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그 결과 5월 초 커브 풀은 평소보다 얇았습니다. 큰 매도가 들어오면 가격이 더 크게 출렁일 조건이 미리 갖춰져 있었던 겁니다.

5월 9일 월요일, 테라는 두 번째로 1달러를 놓쳤습니다.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테라 발행 규모는 약 147억 달러로 줄었고, 앵커에 남은 예금은 약 98억 달러로 내려앉았습니다. 사흘 전 141억 달러였던 예금에서 40억 달러 넘게 빠져나간 겁니다.

모두가 한꺼번에 돈을 빼려 하면, 받쳐 줄 돈이 먼저 바닥납니다. 금융에서 '런'이라고 부르는 현상, 그것이 시작된 겁니다. 은행이라면 그 뒤에 예금보험과 중앙은행이 버티고 있습니다. 테라에는 그런 안전판이 없었습니다.

80,394개의 비트코인

LFG가 쌓아 둔 준비자산의 중심은 비트코인이었습니다. 2022년 5월 7일 기준 보유량은 80,394개. 당시 가치로 31억 달러 안팎이었습니다. 달러를 쌓아 둘 필요가 없는 구조라고 했지만, 결국은 바깥 자산을 모아 비상금으로 들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비상금은 곧바로 시장에 풀렸습니다. 5월 8일, LFG는 거래 상대방과 거래하기 위해 비트코인을 5만 개 넘게 넘겼다고 밝혔습니다. 블록체인 기록으로는 그 물량인 52,189개가 5월 9일 한 거래 회사로 옮겨졌습니다. 당시 가격으로 15억 달러 안팎입니다. 5월 10일에는 나머지 28,205개가 한 거래소로 옮겨졌고, 8억 달러 안팎으로 추산됐습니다.

목표는 이 돈으로 테라를 사들여 가격을 1달러로 밀어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비트코인을 급히 내다 파는 일 자체가 또 다른 문제를 낳았습니다. 수십억 달러어치 비트코인이 며칠 새 시장에 쏟아지면 비트코인 값도 떨어집니다. 비상금을 꺼내 쓰는 동안, 비상금의 가치까지 함께 쪼그라든 겁니다.

LFG는 5월 10일 테라폼랩스가 가격 방어를 위한 마지막 시도로 비트코인 3만 3천여 개를 팔았다고 설명했습니다. 5월 16일 공개된 잔량은 313개. 80,394개가 313개가 됐습니다. 그동안 테라 가격은 끝내 1달러 근처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구조만 놓고 보면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었습니다. 테라 발행 규모는 187억 달러, 비상금은 31억 달러. 테라를 든 사람 다섯 명 중 한 명만 환불을 요구해도 금고가 비는 비율입니다. 준비금 방식이든 알고리즘 방식이든, 받쳐 줄 수 있는 돈보다 받쳐 줘야 할 돈이 많으면 결론은 같아집니다.

죽음의 나선, 사흘 동안의 숫자

여기서 앞의 교환 규칙을 다시 떠올려 보겠습니다. 테라가 1달러보다 쌀 때 작동하는 규칙은 테라를 소각하고 루나를 새로 찍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이 규칙이 테라 유통량을 줄여 가격을 되돌렸습니다. 문제는 테라가 1달러보다 '조금' 싼 게 아니라 '크게' 싸졌을 때입니다.

테라가 0.8달러일 때 1테라를 1달러어치 루나로 바꾼다고 해 보죠. 루나 값이 떨어지는 중일수록 받는 루나 개수는 더 많아집니다. 루나 값이 반 토막 나면, 같은 1달러어치를 만들려고 두 배의 루나를 찍어야 합니다. 그렇게 받은 루나를 사람들은 곧장 팔았고, 루나 값은 더 떨어졌습니다. 값이 떨어지면 다음 사람에게는 더 많은 루나를 찍어 줘야 합니다.

이 되풀이를 '죽음의 나선'이라고 부릅니다. 테라를 지키려고 루나를 찍고, 루나를 찍으니 루나 값이 떨어지고, 루나 값이 떨어지니 테라를 지키는 데 더 많은 루나가 필요해지는 고리입니다. 테라의 담보가 루나였기에, 담보를 늘리는 행동이 곧 담보 가치를 깎는 행동이었습니다. 설계의 전제가 뒤집힌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5월 11일, 테라 커뮤니티는 소각과 발행 속도를 끌어올리는 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하루 교환 한도를 늘려 시장에 쏟아진 테라를 더 빨리 흡수하자는 취지였습니다. 테라 가격은 잠시 0.8달러 선까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시장은 이 조치를 생태계가 보내는 마지막 신호로 읽었습니다. 같은 날 루나 시가총액이 테라 발행 규모보다 작아졌고, 테라는 0.29달러까지 밀렸습니다.

담보의 총액이 부채의 총액보다 작아진 순간, 사실상 결론은 났습니다. 그다음 기록은 숫자만 봐도 충분합니다. 5월 7일 약 3억 5천만 개였던 루나는 5월 10일 약 4천만 개가 새로 발행됐습니다. 5월 11일에는 약 15억 개, 5월 12일에는 약 1,760억 개가 더 찍혔습니다.

그리고 5월 13일, 발행량은 약 6조 5천억 개에 이르렀습니다. 사흘 사이 1만 8천 배 넘게 불어난 겁니다.

가격은 정확히 반대로 움직였습니다. 5월 7일 80달러를 넘었던 루나는 5월 13일 0.00005달러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테라도 5월 12일 0.4달러 선, 5월 13일 0.15달러 선까지 미끄러졌습니다. 1달러에 묶여 있어야 할 코인이 하루에 절반씩 값을 잃고 있었습니다.

체인이 멈추고, 거래소가 문을 닫았습니다

5월 12일, 테라 블록체인이 하루에 두 번 멈췄습니다. 블록을 검증하는 참여자들이 네트워크 가동을 중단한 겁니다. 발행량이 폭증하면서 네트워크를 공격으로부터 지킬 수 없게 됐다는 것이 공식 설명이었습니다. 코인을 옮기는 일도, 거래하는 일도 아예 불가능한 시간이 생겼습니다.

5월 13일 새벽, 체인은 또 멈췄습니다. 테라폼랩스는 검증자들이 네트워크를 재구성할 방안을 마련하려고 멈췄다고 설명했습니다. 같은 시기 바이낸스는 루나와 테라의 현물 거래 대부분을 중단했고, 다른 거래소들도 잇따라 거래 중지와 상장폐지를 발표했습니다.

상장폐지는 보유자에게 마지막 문이 닫히는 일이었습니다. 값이 아무리 낮아도 거래소에서 팔 수만 있으면 일부라도 건질 수 있습니다. 거래가 막히면 그 선택지마저 사라집니다. 게다가 체인이 멈춘 동안에는 지갑에서 거래소로 코인을 옮기는 것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이 며칠 사이에 많은 사람의 손실이 사실상 확정됐습니다.

5월 16일, 권도형은 테라를 떼어 내고 새 체인을 만들자는 제안을 올렸습니다. 그때 테라 가격은 0.1달러 수준이었습니다. 제안은 5월 말 통과돼 새 체인이 출범했고, 옛 체인과 코인은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새 코인은 출범 직후 잠깐 오르는가 싶더니 다시 크게 내려갔습니다.

숫자로 남은 피해, 그리고 이어진 연쇄

미국 검찰에 따르면 2022년 봄 정점에서 테라와 루나의 시가총액 합계는 500억 달러를 넘었습니다. 5월 붕괴로 투자자들이 잃은 돈은 400억 달러 이상으로 집계됐습니다. 앵커 한 곳에서만 5월 6일부터 11일 사이 예금의 약 69퍼센트, 약 95억 달러가 사라졌습니다. 이 돈의 상당 부분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간 게 아닙니다. 가치 자체가 증발했습니다.

국내 피해도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2022년 5월 금융당국이 추산한 국내 루나 보유자는 약 28만 명. 검찰은 국내 피해자를 20만 명 내외, 피해 규모를 수천억 원대로 보고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셈법에 따라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어느 기준으로 봐도 일부 사람들의 일로 넘길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파장은 테라 보유자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루나에 크게 걸었던 가상자산 헤지펀드 스리애로즈캐피털은 2022년 6월 루나 붕괴로 큰 손실을 봤다고 인정했고, 그달 말 법원의 청산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회사에 돈을 빌려줬던 대출 업체들은 줄줄이 출금을 막고 파산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한 곳의 손실이 돈을 빌려준 곳의 손실로, 다시 그곳에 돈을 맡긴 사람의 손실로 번져 갔습니다.

그해 11월에는 대형 거래소 FTX가 무너졌습니다. FTX 사태는 테라와 별개의 사안이고 그 자체로 긴 이야기라, 여기서는 2022년 내내 이어진 연쇄의 마지막 고리였다는 점만 적어 둡니다. 2022년 상반기에만 가상자산 시장 전체 시가총액이 1조 달러 넘게 줄었습니다.

테라폼랩스는 2024년 1월 미국에서 챕터11 파산 절차를 신청했습니다. 같은 해 6월에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44억 7천만 달러 규모의 민사 제재금에 합의했습니다. 2025년 3월 31일에는 피해자들이 손실을 신고할 수 있는 청구 포털이 열렸습니다. 다만 신고한 손실을 전부 돌려받는 구조는 아닙니다.

법정에서 확정된 것,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

형사 절차는 미국과 한국에서 따로 진행됐습니다. 먼저 결론이 난 쪽은 미국입니다. 권도형은 2023년 3월 23일 몬테네그로에서 체포됐습니다. 위조 여권을 쓰려 한 혐의였습니다. 그는 한국 송환을 원했지만, 2024년 12월 31일 미국으로 넘겨졌습니다.

2025년 8월, 권도형은 전신환 사기와 공모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2025년 12월 11일 뉴욕 연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선고는 폴 엥겔마이어 판사가 맡았고, 1,900만 달러가 넘는 범죄수익 몰수도 함께 명령됐습니다.

미국 검찰이 공소사실로 내놓은 내용에는 2021년 5월 가격 회복의 실제 경위, LFG의 독립성에 관한 설명, 결제 서비스 연동에 관한 홍보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만 이 사건에서 확정된 사실은 유죄 인정과 위 선고 결과입니다. 그 너머를 단정하는 데는 조심이 필요합니다.

한국 쪽은 아직 1심이 진행 중입니다. 서울남부지검은 2023년 4월 공동창업자 신현성 전 차이코퍼레이션 대표 등을 자본시장법상 사기적 부정거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가상자산을 증권으로 보고 자본시장법을 적용한 첫 사례여서, 증권으로 인정되느냐가 가장 큰 쟁점입니다. 2026년에 들어서도 증인신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현성 측은 혐의를 전면 부인합니다. 2020년에 권도형과 관계를 끊었고, 폭락은 그 뒤의 사업 운영에서 비롯됐으며, 사업이 규제상 불가능하다고 인식한 적도 없다는 입장입니다. 재판은 3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지만 1심 선고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부분은 '재판 중'이라고만 적는 것이 정확합니다.

재산을 묶어 두는 절차도 따로 다투고 있습니다. 검찰은 2022년 11월 신현성 측 재산 1,541억 원에 추징보전을 걸었습니다. 가족회사 명의로 된 건물이 여기에 포함되느냐를 두고 소송이 벌어졌는데, 서울남부지법은 2025년 11월 가족회사 측 청구를 기각했고 가족회사는 같은 해 12월 항소했습니다. 한편 검찰은 권도형이 한국으로 이송되면 국내에서 별도 재판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역시 아직 정해진 일은 아닙니다.

그 뒤, 각국의 규제는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테라 사태가 남긴 가장 뚜렷한 결과는 규제입니다. 그전까지 스테이블코인은 사실상 아무런 발행 기준 없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2022년 5월 이후 각국은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담보를 실제로 쌓게 할 것, 그리고 보유자에게 이자를 주지 못하게 할 것. 이 두 가지가 공통분모입니다.

유럽연합(EU)은 미카(MiCA)라는 법을 먼저 적용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에 해당하는 토큰 규정은 2024년 6월 30일부터 효력이 생겼습니다. 발행자는 준비자산을 분리해 보관하고, 상환 계획을 당국에 내야 합니다. 알고리즘 방식을 조문으로 콕 집어 금지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실제 자산으로 뒷받침하지 않으면 요건을 맞출 길이 없으니, 사실상 설 자리가 사라졌습니다.

2026년 10월에는 유럽 증권시장감독청이 역내 거래 플랫폼에 미카 승인을 받지 않은 스테이블코인을 석 달 안에 내리라고 요구했습니다. 규정이 서류에 머물지 않고 실제 시장에 닿기 시작한 셈입니다.

미국은 2025년 7월 18일 지니어스법(GENIUS Act)을 법률로 확정했습니다. 발행자는 발행액의 100퍼센트 이상을 현금, 예금, 미국 단기 국채, 머니마켓펀드 같은 정해진 자산으로 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유자에게 어떤 형태의 이자나 수익도 줄 수 없습니다. 앵커의 연 19.5퍼센트 같은 구조는 이 조항 하나로 막히는 셈입니다.

다만 미국도 알고리즘 방식을 당장 금지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발행자가 스스로 만든 디지털자산을 담보로 쓰는, 이른바 내생적 담보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재무부가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금지할지 허용할지는 미뤄 두고, 먼저 들여다보기로 한 겁니다.

한국은 2024년 7월 19일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을 시행했습니다. 이용자 예치금 분리 보관, 시세조종 같은 불공정거래 처벌, 거래소의 이상거래 감시 의무가 담겼습니다. 다만 이 법은 코인 발행이나 스테이블코인 자체는 다루지 않습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규정은 2026년 10월 현재까지 국회에서 논의 중이고, 누가 발행할지와 어떻게 인가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설계가 불가능했을까, 운영이 문제였을까

이 사건에는 아직 답이 나오지 않은 질문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설계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했던 걸까요. 아니면 설계는 가능했는데 운영을 잘못해 무너진 걸까요. 법정에서 다투는 쟁점과는 별개로, 공학과 경제학의 영역에서 지금도 이어지는 논쟁입니다.

'설계부터 불가능했다'는 쪽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담보가 자기 생태계에서 찍은 코인이라면, 평소에 아무리 잘 돌아가도 담보 값이 떨어지는 국면에서는 담보를 늘리는 행동이 담보 가치를 깎습니다. 숫자 몇 개를 손봐서 없앨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구조에 박혀 있는 성질이라는 겁니다. 테라 이전에도 비슷한 설계가 작은 규모로 여러 번 무너졌고, 테라는 같은 일을 가장 큰 규모로 되풀이했을 뿐이라는 설명입니다.

'운영이 문제였다'는 쪽은 다르게 봅니다. 담보가 아예 없었던 게 아니라, 받쳐 줄 바깥 자산을 187억 달러라는 규모에 비해 턱없이 적게 준비한 것이 문제였다는 주장입니다. 수요의 75퍼센트가 이자 상품 한 곳에 몰린 점, 그 이자가 사실상 영업비용으로 나가고 있었던 점, 교환 풀이 얇아진 시점에 큰돈이 빠져나간 점도 설계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봅니다. 담보 비율을 충분히 높게 유지하는 혼합형 설계가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이쪽의 근거입니다.

흥미롭게도 두 입장은 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담보를 충분히 두껍게 쌓으면, 그건 이미 알고리즘 방식이 아니라 담보 방식에 가까워진다는 점입니다. 달러를 쌓지 않아도 되는 가벼움이 이 설계의 매력이었는데, 안전하게 만들려면 바로 그 매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각국 규제가 '금지'라는 단어 대신 '준비자산 요건'이라는 방식으로 답한 것은, 이 논쟁에 대한 꽤 현실적인 결론처럼 보입니다.

높은 이자보다 먼저 물었어야 할 것

테라 사태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숫자는 연 19.5퍼센트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핵심은 이자가 높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이자가 어디서 오는지 설명할 수 있었느냐에 있습니다. 앵커의 이자는 빌려 가는 사람의 돈으로 채워지지 않았고, 모자란 만큼은 별도 자금으로 메워졌습니다. 그 자금이 어디서 와서 언제쯤 바닥날지는, 공개된 기록만으로도 계산할 수 있는 숫자였습니다.

'한 번 버텼다'는 경험이 주는 안심도 돌아볼 만합니다. 2021년에 1달러를 되찾은 일은 구조가 검증됐다는 증거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그때 규모는 19억 달러, 1년 뒤에는 187억 달러였습니다. 작은 규모에서 통한 방어가 큰 규모에서도 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안심이야말로 가장 비싼 비용이었습니다.

담보가 무엇인지 끝까지 따라가 보는 습관도 남습니다. 테라의 담보는 루나였고, 루나의 가치를 받친 건 테라에 대한 수요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가리키며 원을 그리는 구조였고, 그 원 안으로 들어온 바깥 자산은 생태계의 덩치에 비해 적었습니다. 가상자산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자산이든 '무엇이 이 값을 받쳐 주는가'라는 질문 하나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성질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손실을 본 사람들이 어리석었다는 이야기로 정리될 수 없습니다. 당시 테라와 루나는 가상자산 시가총액 상위 10위 안에 있었고, 세계 주요 거래소에 올라 있었으며, 이름난 투자사들이 돈을 넣고 있었습니다. 제도와 공시가 아직 자리 잡지 않은 곳에서는 덩치와 유명세가 안전의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 사건이 가장 비싸게 알려 준 사실입니다.

수익률 숫자를 보기 전에 구조를 먼저 이해하는 일. 2022년 5월의 기록이 오늘 우리에게 남겨 주는 몫은 그것입니다. 1달러를 약속한 코인 곁에서 사흘 만에 6조 개가 넘는 코인이 찍혀 나왔다는 사실은, 약속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약속을 무엇이 받치고 있느냐가 값을 정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