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한 방울이 만든 90억 달러의 신기루
2026-09-23 · 7분 읽기
손끝을 살짝 찔러 얻은 피 몇 방울. 그것만으로 수백 가지 검사를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2014년,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바이오 기업이 바로 이 약속 하나로 90억 달러라는 기업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회사 이름은 테라노스. 창업자는 갓 서른 살을 넘긴 참이었습니다. 경제지들은 앞다퉈 표지에 그의 얼굴을 실었고, 서류상 지분 가치만 수십억 달러로 계산됐습니다.
병원에서 주삿바늘로 피를 여러 통 뽑아 본 사람이라면 귀가 솔깃할 이야기였습니다. 검사 비용은 내려가고 결과는 빨라집니다. 바늘이 무서워 검진을 미루던 사람도 부담 없이 건강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투자자들은 이 그림에 7억 달러가 넘는 돈을 걸었습니다. 이사회에는 전직 국무장관과 국방장관, 4성 장군, 대형 은행 최고경영자가 나란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2018년 9월, 테라노스는 조용히 해산했습니다. 그리고 2022년 1월 3일, 창업자는 미국 연방법원 배심원단에게서 유죄 평결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회사 안에서 가장 먼저 소리 내어 말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이사회의 거물들이 아니었습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십 대 직원들이었습니다.
열아홉 살 중퇴생이 세운 회사
테라노스는 2003년에 세워졌습니다. 창업자 엘리자베스 홈스는 스탠퍼드대 화학공학과를 다니다 그만두고, 부모가 마련해 둔 학비를 종잣돈 삼아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회사 이름은 치료를 뜻하는 단어와 진단을 뜻하는 단어를 붙여 만든 것이었습니다.

목표는 처음부터 분명했습니다. 채혈하는 피의 양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겠다는 것.
회사가 내세운 장비의 이름은 에디슨이었습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을 만한 상자 안에서, 극소량의 혈액으로 여러 검사를 처리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피를 담는 작은 용기에도 따로 이름을 붙여 상징처럼 활용했습니다. 검은 터틀넥 차림으로 무대에 서는 창업자의 모습은 실리콘밸리의 익숙한 성공 서사와 자연스럽게 겹쳤습니다.
다만 이 회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기술의 원리를 거의 공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의학 분야에서는 새 진단 기술이 나오면 다른 연구자들이 같은 방법으로 시험해 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검증하는 것이 관행입니다. 테라노스에는 그런 논문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회사는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를 댔습니다. 놀랍게도 그 침묵은 의심이 아니라 신비감을 키웠습니다.
지배구조도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창업자가 의결권이 큰 주식을 쥐고 있어서, 외부 주주가 경영을 견제하기 어려운 구조였다는 점이 나중에 여러 차례 지적됐습니다. 투자자는 돈을 넣었지만, 회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들여다볼 창은 좁았습니다.
회사 안에서도 부서끼리 정보를 나누지 못하게 하는 규칙이 엄격하게 적용됐다고 전해집니다.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뿐이었다는 뜻입니다.
화려한 이사회, 비어 있던 자리
한때 테라노스 이사회 명단은 이랬습니다. 헨리 키신저와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샘 넌 전 상원의원, 제임스 매티스 장군, 게리 러프헤드 제독, 리처드 코바세비치 전 웰스파고 최고경영자. 미국 외교와 안보, 금융을 상징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이 명단 자체가 회사의 가장 강력한 홍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명단을 다시 들여다보면 빈자리가 보입니다. 진단검사의학이나 임상 실험실을 업으로 삼아 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심장외과 의사 출신인 빌 프리스트 전 상원 원내대표 정도가 드문 예외였습니다. 혈액 검사 장비의 정확도를 따져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장비로 사업하는 회사의 이사회에 사실상 없었던 셈입니다.
이사회가 하는 일은 경영진을 감시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하려면 그 분야를 알아야 합니다. 모르는 분야에서는 설명을 들어도 그게 충분한 설명인지 판단할 수 없고, 되물을 지점도 찾지 못합니다.
외교와 안보에 평생을 바친 사람에게 혈액 검사 장비의 오차 범위를 따져 보라는 건 애초에 무리한 요구였습니다. 이름값은 회사에 신뢰를 빌려줄 수는 있어도, 검증을 대신해 주지는 못합니다.
훗날 재판정에서 매티스 장군은 자신도 8만 5천 달러를 투자했고, 직접 피를 뽑아 회사의 검사를 받아 봤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름을 빌려준 사람들 상당수도 속은 쪽에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화려한 명단은 바깥 투자자에게 보증서처럼 보였지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막아 주지는 못했습니다.
약국 매대 뒤에서 벌어진 일
2013년부터 테라노스의 검사는 실험실을 벗어나 일반 소비자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형 약국 체인 월그린과 손잡고 매장 안에 검사 코너를 열었는데, 애리조나주를 중심으로 마흔 곳 넘게 운영됐습니다. 대형 유통업체 세이프웨이는 3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해 800개 점포로 넓히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2015년 이를 접었습니다.
문제는 매대 뒤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자사 장비로 처리한 검사는 전체 항목 가운데 극히 일부였습니다. 대부분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기존 상용 장비로 돌렸습니다. 그마저도 채혈량이 적다 보니 혈액을 희석해 기계에 넣는 방식이 동원됐습니다. 희석은 미세한 성분을 더 흐리게 만들기 때문에 결과의 신뢰도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갔습니다. 실제보다 높거나 낮게 나온 수치를 받아 든 사람들이 병원을 다시 찾았습니다. 회사는 2016년, 자사 장비로 처리한 2년치 검사 결과를 스스로 무효로 돌렸습니다.
주식이라면 잘못된 판단은 손실로 끝납니다. 의료 검사는 다릅니다. 잘못된 수치 하나가 불필요한 치료로 이어지거나, 거꾸로 필요한 치료를 늦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은 오랫동안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은 입사할 때 강도 높은 비밀 유지 서약을 했고, 회사는 외부에 시연할 때도 기계가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투자자와 제휴사가 받아 본 건 결과지뿐이었습니다. 검증이란 결국 과정을 들여다보는 일인데, 그 과정이 통째로 가려져 있었던 겁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들
이상하다고 먼저 말한 사람은 에리카 청과 타일러 슐츠였습니다. 둘 다 갓 입사한 이십 대 직원이었습니다. 타일러 슐츠는 이사회에 이름을 올린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의 손자이기도 했습니다. 회의실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숫자가 흔들리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한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회사는 법률 대리인을 앞세워 강하게 맞섰고, 타일러 슐츠는 할아버지와 회사 사이에서 몇 년을 버텨야 했습니다. 그는 훗날 그 과정에서 가족이 법률 비용으로 큰 부담을 졌다고 밝혔습니다. 회사에서 가장 약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가장 큰 위험을 떠안은 겁니다.
2015년 10월, 월스트리트저널의 존 캐리루 기자가 첫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테라노스가 자사 장비로 처리하는 검사는 극히 일부이고, 나머지는 남의 기계를 쓰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회사는 기사를 전면 부인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고, 한동안 여론은 기자와 회사 사이에서 엇갈렸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사 한 편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규제기관이 실험실을 직접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2016년 7월, 미국 공공 의료보험 운영을 맡은 연방기관 CMS가 테라노스 실험실의 인증을 취소하고, 홈스에게 2년간 실험실 운영을 금지했습니다. 월그린은 같은 해 제휴를 끝냈고, 그해 10월 테라노스는 검사 코너와 실험실을 닫으며 340명을 내보냈습니다. 2017년에는 애리조나주와 합의해 주민들에게 465만 달러를 환불했습니다.
법정에서 확정된 것들
2018년 3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테라노스와 홈스를 대규모 사기 혐의로 제소했습니다. 같은 해 6월에는 형사 기소가 이어졌고, 9월에 회사는 남은 자산을 채권자에게 넘기며 해산 절차를 밟았습니다.
한때 90억 달러로 불리던 기업의 마지막은 파산 법정의 소동조차 없이 조용했습니다. 7억 달러가 넘는 투자금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재판은 2021년에 열렸습니다. 2022년 1월 3일, 배심원단은 투자자를 상대로 한 사기 공모 한 건과 전신사기 세 건에 유죄 평결을 내렸습니다. 환자와 관련된 일부 혐의는 무죄였고, 일부는 배심원들의 의견이 갈려 평결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11월 18일 법원은 징역 11년 3개월을 선고했고, 홈스는 2023년 5월 30일 수감됐습니다.
동업자이자 전 사장이었던 서니 발와니는 따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2022년 7월 배심원단은 열두 개 혐의 모두에 유죄 평결을 내렸고, 그해 12월 법원은 징역 12년 11개월을 선고했습니다. 법원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책임도 함께 물었습니다.
두 사람은 항소했습니다. 그러나 2025년 2월 연방 제9순회항소법원은 유죄 판단을 그대로 유지했고, 다시 심리해 달라는 요청도 같은 해 기각됐습니다. 90억 달러라는 숫자가 처음 붙은 때로부터 11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피 한 방울보다 무거웠던 것
테라노스가 판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이야기였습니다. '피 한 방울'이라는 말은 너무 선명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많은 사람이 다음에 와야 할 검증 단계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야기가 좋을수록 검증이 느슨해지는 현상은 실리콘밸리만의 일이 아닙니다. 새 기술을 앞세운 회사가 나타날 때마다 시장은 비슷한 리듬으로 움직입니다. 좋은 이야기는 투자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결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름값과 검증도 다른 것입니다. 이사회에 유명 인사가 있다는 사실, 이름난 투자자가 들어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기술이나 회계를 보증해 주지 않습니다. 확인해야 할 건 누가 이름을 올렸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무엇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느냐입니다.
설명을 거부하는 회사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을 물었을 때 '영업비밀'이라는 답만 되풀이된다면, 그 침묵이 신비감으로 포장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볼 만합니다. 진짜 기술은 대개 어떤 형태로든 검증의 흔적을 남깁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 말했는지를 기억해 둘 만합니다. 이 회사에서 위험 신호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가장 힘없는 쪽이었고, 가장 오래 침묵한 쪽은 가장 이름이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불편한 질문은 대개 변두리에서 먼저 나오고, 그 질문이 무시당하는 동안 값은 계속 오릅니다.
90억 달러의 신기루에 처음 금이 가게 한 건 화려한 이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실험실 한구석에서 흔들리는 숫자를 의심한 이십 대 직원 두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