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을 자산 칸으로 옮겨 적은 회사
2026-09-26 · 8분 읽기
낮에는 평소처럼 일하고, 퇴근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장부를 펼쳤습니다. 2002년 봄, 미국 통신회사 월드컴의 내부감사팀 직원 몇 명이 그렇게 밤마다 사무실에 남았습니다. 조사 사실이 새어 나가면 자료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들여다보던 숫자는 회사 맨 꼭대기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2002년 6월 25일 저녁, 월드컴이 짧은 발표문을 내놓았습니다. 최근 다섯 분기 실적을 다시 작성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익이 38억 달러가량 부풀려져 있었다는 겁니다. 불과 두 해 전까지만 해도 이 회사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장거리 통신사였고, 주식시장에서 손꼽히는 성장주였습니다.
한 달도 안 된 7월 21일, 월드컴은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습니다. 장부에 적힌 자산은 1,038억 달러, 부채는 410억 달러. 2008년 리먼브러더스가 무너지기 전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파산이었습니다. 이후 조사에서 부풀려진 규모는 11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사건의 수법은 놀라울 만큼 단순했습니다. 새로운 금융 상품을 발명한 것도, 아무도 모르는 해외 법인을 끌어들인 것도 아닙니다. 해마다 어김없이 나가는 비용 하나를 장부의 다른 칸으로 옮겨 적었을 뿐입니다. 회계 교과서 첫 장에 나오는 구분 하나를 어긴 것이, 수백억 달러짜리 거짓말로 자라났습니다.
커피숍에서 출발해 MCI를 삼키기까지
월드컴의 출발은 소박했습니다. 1983년 미시시피주의 한 커피숍에서 몇 사람이 모여 장거리 통신 재판매 회사를 세웠습니다. 이름은 롱디스턴스 디스카운트 서비스, 줄여서 LDDS. 큰 통신사에서 회선을 싸게 빌려 와 기업과 가정에 되파는 사업이었습니다. 1985년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된 인물이 버나드 에버스였습니다.
에버스의 전략은 한 줄이면 됩니다. 사서 키운다. 작은 지역 통신사들을 쉬지 않고 인수해 몸집을 불렸고, 그 과정에서 주가는 계속 올랐습니다. 주가가 오르면 그 주식을 대금 삼아 더 큰 회사를 살 수 있었죠. 1996년에는 인터넷 기간망 업체 MFS 커뮤니케이션스를 인수해, 전화 회사에서 인터넷 회사로 발을 넓혔습니다.
절정은 1997년 11월 10일이었습니다. 월드컴이 자기보다 훨씬 이름값이 높은 통신사 MCI를 370억 달러에 사겠다고 발표한 겁니다. 시골의 재판매 업체가 미국 통신업계의 간판 기업을 집어삼킨 셈이었습니다. 합병은 1998년 9월 15일에 마무리됐고 회사 이름은 MCI 월드컴이 됐습니다. 인수합병으로 크는 경영자의 교과서적인 성공 사례라는 찬사가 따라붙었습니다.
하지만 인수합병으로 크는 회사에는 숙제가 하나 따라붙습니다. 인수를 멈추면 성장도 멈춘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두 회사를 합치면 매출은 단숨에 커지지만, 그렇게 커진 매출은 다음 해의 비교 기준이 됩니다. 시장은 계속 두 자릿수 성장을 기대했고, 그 기대를 채울 방법은 더 큰 인수뿐이었습니다.
1,290억 달러짜리 합병이 무산된 날
그래서 다음 목표는 더 컸습니다. 1999년 10월 5일, MCI 월드컴은 경쟁사 스프린트와 1,290억 달러 규모로 합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성사되면 미국 통신 시장의 지도가 다시 그려질 거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 법무부와 유럽연합(EU)이 독점 문제를 들어 제동을 걸었고, 2000년 7월 13일 양쪽 이사회는 합병을 없던 일로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통신 거품이 꺼지기 시작한 때와 겹칩니다. 1990년대 말 세계는 인터넷 수요가 끝없이 늘어날 거라고 믿었고, 통신회사들은 앞다퉈 광케이블을 깔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깔아 놓고 보니 회선이 남았습니다. 회선 값은 떨어지는데, 남의 회선을 빌려 쓰는 비용은 계약 때문에 그대로 나갔습니다. 업계 전체의 수익성이 빠르게 나빠졌습니다.
월드컴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장 엔진이던 인수합병은 막혔고, 본업의 마진은 얇아졌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시장에 약속해 온 이익 수준과 주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실제 실적과 약속한 실적 사이에 벌어진 틈. 회계 부정은 거의 언제나 그 틈에서 자랍니다.
당시 미국 대기업 경영자들이 분기마다 받던 압박을 떠올려 보면 사정이 더 선명해집니다. 증권사 분석가들의 예상치를 조금만 밑돌아도 주가는 하루에 두 자릿수로 빠졌습니다. 경영자 보수의 상당 부분이 주식과 스톡옵션, 즉 주가에 연동된 보상으로 묶여 있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숫자를 맞추는 일이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내 지갑의 문제가 되면, 판단은 쉽게 흐려집니다.
비용 칸에서 자산 칸으로, 한 줄의 이동
이 회사가 무엇을 했는지 이해하려면 회계의 아주 기본적인 구분 하나만 알면 됩니다. 기업이 돈을 쓰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비용입니다. 전기 요금이나 임대료처럼 그해에 쓰고 사라지는 돈으로, 쓴 해의 이익에서 곧바로 빠집니다. 다른 하나는 자산입니다. 공장이나 장비처럼 여러 해에 걸쳐 쓰는 물건에 들인 돈으로, 쓰는 기간 동안 조금씩 나눠 비용으로 털어 냅니다.
월드컴에는 회선 사용료라는 거대한 비용 항목이 있었습니다. 다른 통신사의 회선을 빌려 쓰는 대가로 해마다 내는 돈인데, 2001년 한 해에만 정상적으로 처리된 금액이 147억 달러였습니다. 이건 성격상 완벽한 비용입니다. 빌려 쓴 해가 지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요. 남의 집에 낸 월세를 두고 내 재산이 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이 회선 사용료의 일부를 '선급 설비'라는 이름의 자산 항목으로 옮겨 적었습니다. 비용 칸에서 지우고 자산 칸에 다시 쓴 겁니다. 그러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해 비용이 줄어 이익이 늘고, 회사 자산도 커집니다. 앞으로 십 년 넘게 나눠 털면 된다는 논리로, 당장의 손실을 미래로 밀어 둔 셈입니다.
규모는 작지 않았습니다. 2001년 한 해에 30억 5,500만 달러, 2002년 1분기에 7억 9,700만 달러가 이런 식으로 옮겨졌습니다. 분기마다 7억 5,000만 달러쯤이 비용에서 자산으로 건너간 겁니다.
이와 별도로, 예전에 넉넉히 잡아 둔 준비금 계정을 풀어 비용을 깎는 방법도 1999년부터 2001년 사이에 쓰였습니다. 이 부분만 33억 달러였고, 2002년 8월 8일에 따로 공개됐습니다.
같은 시기에 무너진 엔론과 견주면 성격이 뚜렷해집니다. 엔론은 회사 밖에 특수한 법인을 수없이 만들고 복잡한 거래를 얽어 빚을 장부에서 지운, 전문가도 따라가기 힘든 구조였습니다. 월드컴은 정반대였습니다. 장부의 한 줄을 다른 줄로 옮겨 쓴 게 거의 전부였죠. 정교해서 무서운 부정이 있고, 너무 단순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무서운 부정이 있습니다.
밤에 장부를 뒤진 사람들
이 단순한 수법을 찾아낸 건 규제 기관도, 외부 회계법인도 아니었습니다. 회사 안의 내부감사팀이었습니다. 내부감사는 회사가 스스로 살림을 점검하려고 두는 조직으로, 원래는 낭비나 절차 위반을 잡아내는 일을 합니다. 팀을 이끈 사람은 신시아 쿠퍼였습니다. 같은 팀의 글린 스미스가 자본지출, 즉 자산으로 처리된 지출 쪽 점검 일정을 앞당기자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2002년 5월 말 시작된 점검에서 숫자가 맞지 않았습니다. 자산으로 처리된 항목들의 근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 조사가 회사 최고위층을 겨누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감사팀은 낮에는 평소 업무를 보고, 밤에 남아 장부를 뒤졌습니다. 조사가 새어 나가면 자료가 사라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6월 중순, 쿠퍼는 조사 결과를 이사회 감사위원회 의장에게 직접 보고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습니다. 외부 감사를 맡은 아서앤더슨이 문제의 자본지출 부분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회계법인은 나중에 2001년 감사의견을 스스로 거둬들였습니다. 바깥에서 찍어 준 도장이 반드시 안전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다음은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6월 25일 회사가 재무제표 재작성을 발표했고, 이튿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회사를 제소했습니다. 법원은 자료 폐기와 임원 보수 지급을 막는 명령을 내렸고, 7월 초 독립 감시인이 선임됐습니다. 그리고 7월 21일 파산보호 신청이 접수됐습니다. 내부감사팀이 야근을 시작한 지 두 달도 안 돼서였습니다.
한 회사의 붕괴가 바꾼 법
월드컴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법입니다. 2002년 7월 30일, 미국에서 사베인스-옥슬리법이 서명돼 시행됐습니다. 그해 초 엔론 사태로 이미 논의되던 법안이었지만, 월드컴이 무너지자 의회의 속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수법이 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을 낳았다는 충격이 그만큼 컸습니다.
이 법의 뼈대는 세 가지입니다. 먼저 CEO와 재무책임자가 재무제표가 정확하다는 것을 직접 서명으로 보증하고, 거짓이면 형사 책임을 지게 했습니다. 다음으로 기업이 내부통제 장치를 갖추고, 그것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해마다 평가해 공개하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계법인을 감독하는 별도 기구를 만들고, 한 회계법인이 감사와 경영 자문을 함께 맡는 관행에 제한을 뒀습니다.
책임을 물은 결과도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CEO였던 버나드 에버스는 2005년 3월 15일 유죄 평결을 받고, 같은 해 7월 13일 2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2019년 12월 건강 문제로 조기 석방됐고 2020년 2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고재무책임자(CFO)였던 스콧 설리번은 유죄를 인정하고 2005년 8월 5년형을 받았습니다. 회계 실무를 맡았던 임원들에게도 각각 유죄가 확정됐습니다.
회사 자체는 살아남았습니다. 이름을 MCI로 바꾸고 2004년 파산 절차에서 벗어났습니다. 다만 예전 몸집은 아니었고, 2006년 1월 버라이즌에 인수되면서 월드컴이라는 이름은 기업 목록에서 사라졌습니다. 한편 내부감사를 이끈 신시아 쿠퍼는 엔론과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내부고발자들과 함께 타임의 2002년 올해의 인물로 뽑혔습니다.
장부의 한 줄이 묻는 것
이 이야기가 개인투자자에게 건네는 첫 질문은 '이 성장은 어디서 왔는가'입니다. 월드컴은 매출이 늘어나는 회사였지만, 그 증가의 상당 부분은 새 회사를 사들여 만든 것이었습니다. 사업 자체가 좋아져서 늘어난 이익과, 회계 처리나 인수로 만들어 낸 이익은 겉으로 똑같아 보입니다. 성장률이라는 숫자 하나만 봐서는 둘을 절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이익과 현금 사이의 간격도 봐야 합니다. 비용을 자산으로 옮겨 적으면 이익은 늘지만, 회사 통장에서 나간 돈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이익은 좋아지는데 현금흐름은 그만큼 좋아지지 않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손익계산서 맨 아랫줄만 보지 말고 현금이 얼마나 들어오고 나갔는지 함께 보라는 조언은 여기서 나옵니다.
검증을 대하는 태도도 돌아볼 만합니다. 이 회사의 장부에는 세계적인 회계법인의 감사의견이 붙어 있었고, 증권사들의 매수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를 찾아낸 건 회사 안에서 밤늦게 남아 숫자를 맞춰 본 몇 안 되는 직원들이었습니다. 권위 있는 도장이 찍혀 있다는 사실이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남는 건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월드컴의 몰락은 복잡한 금융 기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약속한 숫자를 지키려고 장부의 한 줄을 옮긴 선택이 해마다 되풀이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멈춘 건 새로운 제도가 아니라, 맞지 않는 숫자를 그냥 넘기지 않은 몇 사람의 고집이었습니다.
어떤 회사를 볼 때 숫자만큼이나 그 숫자를 만드는 사람들을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한 줄을 옮겨 적은 사람도, 그 한 줄을 끝까지 따라간 사람도, 모두 같은 회사 안에 있었습니다.